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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 Feb 28. 2024

2월의 작은 일기들

01.

그런 거 있잖아요, 크레파스 냄새 같은 거. 빨간색이나 파란색이랑 금색은 질감이 다르잖아요. 금색은 또 은색이랑 다르고요. 그런 기억들은 수 십년이 지났는데도 가끔씩 문득 떠올라요. 굉장히 깊게요.


02.

가까운 사람을 멀리서 볼 때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멀리서 볼 때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든다.

나를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다가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올 때라든지

내 바로 옆이 아니라, 모르는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있는 걸 멀리서 볼 때라든지.

그럴 때 갑자기 매우,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03.

영원한 게 없는 것만큼 축복인 게 있을까. 싶은 요즘.


04.

꿈에서는 실제라면 하지 않을 생각과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해버릴 때가 있다.

너무 쉽게 사람을 죽일 때도 있고, 모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도 있다.

하지만 평소의 나는 요리할 때 고기나 생선을 칼로 썰지도 못하며,

모르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내 목숨을 바쳐 구할만큼 의롭지도 않다.


05.

나는 우는 아이도 좋아할만큼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고, 내 아이가 태어나면 끔찍히 사랑하기야 엄청나게 하겠지만, 영 잘 키울 자신은 없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나처럼, 내가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자랄까봐 겁난다. 사회적으로는 바르고 일탈 한 번 안 하고 살겠지만 내적으로는 엉망진창일 것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06.

나도 내가,

아주아주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심해 잠도 못 잘 정도였던 내가

죽음만이 진정한 평화라느니 해방이라느니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람은 이렇게나 많이 변한다.


07.

평소의 나는 마음이 쿠크다스보다도 약해서(TMI지만 며칠 전 오랜만에 먹은 쿠크다스는 예전보다 강해졌다. 포장을 뜯을 때 전혀 부서지지 않는다..! 하지만 덜 맛있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누군가 거짓말을 하거나 오해를 해서 누명 쓰는 상상을 하며 발발 떤다. 상상만으로 식은땀이 나고 소름이 돋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08.

부모에 대한 평가는 그의 자식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부모들끼리 에이 그래도 너는 좋은 부모지,

혹은 너같은 것도 부모라고,

하는 식의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09.

사랑하는 사람들과 강아지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사후세계가 있으면 좋겠다가도

죽어서까지 현생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고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어쩌면 선택권이 주어질까? 나쁜 기억은 지워주는.

근데, 그럼 그게 또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나?

게다가 영생이라는 것은 죽음보다 끔찍한데, 그때 되면 마음이 바뀌려나?

천국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를텐데 그걸 다 어떻게 맞춰주지?

아니 그럼, 천국이란 그냥 하느님한테 정신조종 당할 뿐인 거 아냐?

다시 태어날래, 소멸할래, 영생할래, 선택권을 주려나?

근데 이걸 골라야 하는 상황 자체도 지옥일 것 같으으아악!

(샤워할 때 자꾸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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