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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이 Jun 22. 2024

나의 테이아

약 45억년 전 거대한 미행성이 원시지구와 충돌했다. 먼 미래의 과학자들은 그 미행성을 '테이아'라고 이름지었다. 테이아는 빠른 속도로 날아와 지구와 부딪혔다. 충격으로 지구의 자전축은 기울어졌고 지구의 일부와 테이아는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 지구와 테이아의 부서진 잔해들은 비슷한 성질의 물질들끼리 뭉쳐져 혼합되어 또다른 행성을 이루었고 그 행성은 지구의 위성이 되어 훗날 '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갑작스러운 충돌으로 45억년을 함께 지구와 달.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사고와 같은 만남이 많은 것을 바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있다. 


  이것이 어찌 비단 행성만의 일이겠는가. 인간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 상상도 못한 만남이 나의 많은 것을 바꾸기도 한다. 또한  '미행성'이 주위를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기도 한다.


 모든 이에게 그런 테이아가 있을 것이다. 지구 옆에 달이 있는 것이 당연하듯이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으로 계속해서 서로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도 그런 테이아가 있다. 12살에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 얘기다. 12살에 같은 반이었지만 서로 다른 무리였던 우리는 많은 말을 섞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가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어린나이에도 알았다. 12살의 나는 매사 눈치를 많이 봤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진짜 학교에 결석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고,(엄마의 영향이 컸다.) 욕이라는 건 입에 담으면 땅이 솟아 오르는 줄 알았다. 옆에 친구들이 욕을 하면 혼자 헉, 하고 놀라는 일이 일쑤였을 정도로 나름 '모범적'인 아이였다. 그러나 그 여자아이는 12살 답지않게 쿨한 성미에 욕도 심심치않게 했다. 또한 매사에 당당했다. 공부를 잘하지않아도, 숙제를 해가지 않아도, 심지어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아도! 그 아이는 항상 당당했다. 그리고 그런 성격에서 나오는 유쾌함이 주변 친구들을 곧잘 웃게했다. 내심 그 친구를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도 종종 했던 것 같다. 반면 나는 준비물을 챙겨가지 않으면 그 수업 전부터 심장이 뛰고 발을 동동거렸다. 또한 숙제를 안해가는 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당연스럽게도 우리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못한 채 초등학교 5학년을 보냈다. 그리고 6학년을 앞둔 반배정에서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다. 나는 사실 절망했다. 그 친구 말고는 의지할 다른 친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소심한 성격탓에 친구들을 많이 알고 지내지 못한 탓이 크기도 했다. 그러나 안맞는 친구와 있는 것보다 혼자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13살 그 시절 우리는 서로 외에는 딱히 아는 친구가 없어 자연스럽게 개학식에서 함께 짝을 지어 앉았다. 그러나 우리는 1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거의 다 지나도록 함께 급식을 먹고, 함께 등하교를 하고, 학원도 함께 다니고 주말에도 함께 놀며 시간을 보냈다. 말그대로 단짝친구가 됐던 것이다. 작은 일에도 벌벌떨던 13살의 나는 이 친구와 함께 하면서 점점 대범해지는 법을 배웠다. 몸이 안좋으면 학교나 학원에 빠져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친구들에게 유쾌한 농담을 던지는 법도 배웠다. 더 이상 준비물을 안 챙겨갔다고 해서 벌벌떨지 않았다. 의연하게 벌칙인 깜지를 받아들였다.(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법을 배웠다고 하자.) 변화된 성격 때문인지 점점 아는 친구들도 많아지고 교우관계도 매우 좋아지게 되었다. 내 지금 성격의 많은 부분이 그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친구와 알고 지냈던 세월이 모르고 지냈던 세월보다 더 많아졌다. 사춘기의 초입부터 많이 시들해진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이 친구와 나는 서로의 곁을 지켰다. 우리는 참 많은 대화를 나눴고, 참 많이 비슷해져 갔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까지 많이 닮아 둘 다 동시에 똑같은 말을 해도 그닥 놀라지 않고 5초 뒤에 얘가 무슨 말을 할 지까지 맞추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의 충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 섞이고 닮아가고 있었다. 이 친구를 모르던 시절의 나는 왠지모르게 딱했고, 항상 주눅들어있었다. 어리고 딱한 나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의 팔할은 이 친구 덕분이다. 나의 테이아는 그렇게 내 조각을 떼어갔다.


 사춘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준 나의 테이아에게 감사인사를 건네며, 나의 친구 너는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나보다 훨씬 덜 우울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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