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독일, 내일은 한국
오늘은 독일 생활과 다소 무관한 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귀국일이 코앞에 다가오니 자연스레 복잡한 마음이다. 나의 귀국 소식을 아는 사람들은 묻는다 "Are you excited?"
이 단순한 질문에 쉽게 답할 수가 없다. 그토록 바라던 한국행인데 나는 지금 들뜨는 마음보다는 걱정이 크다. 빠뜨리는 것 없이 마무리는 잘하고 있는지, 가서 시차는 어떻게 잘 적응할지, 내가 잠시 떠난 사이 바뀐 사회 분위기나 업무 방식은 어떻게 빨리 따라잡을 수 있을지, 또 앞으로 내 삶을 어떻게 쌓아나갈지에 대해 막연한 걱정이 몰려온다. 어련히 잘하겠지 싶으면서도 마냥 신날 수가 없다.
정신없는 마지막 나날들이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차근차근 준비했다 생각했는데도 어쩔 수 없나 보다. 회사에서는 인수인계와 업무 마무리를 하고, 회사 밖에서 친구/동료들에게 인사하고 또 귀국 전 끝없는 서류처리와 짐 싸기까지 처리할 일이 산더미이다. 그 와중에 연초부터 독감에 걸려 38도 넘는 고열에 시달렸다. 액땜 한번 제대로 한다. 집, 보험, 은행 등 각종 계약을 해지하며 그래도 8년이나 살았다고 내가 독일에 살았던 흔적이 이리도 많구나 싶다. 미니멀리스트라 자부했는데 잡동사니는 왜 이리 많은 건지- 캐리어 두 개에 쏙 들어갔던 짐이 어느새 집 하나를 가득 채웠다. 15년에 가져온 SSAT 문제집부터 토익 보카 단어장까지 독일까지 이고 지고 왔던 유물들이 잔뜩 발견된다. 최소한의 짐을 가져가려 다 버리고 팔고 있지만, 또 추억이 담긴 쓸데없는 건 차마 버리지 못한다. 예를 들어 카니발 때 입었던 슈퍼마리오 코스튬.. 아직도 짐 상자와 쓰레기봉투, 그 사이에 놓여있다. 버려야겠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실업급여도 받아보고 여행도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세상만사 원하는 대로 안 되는 법 - 출국 전날까지 출근하고, 또 일주일 만에 새 직장에 출근하는 죽음의 레이스를 앞두고 있다. k직장인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한 유럽인 동료는 오래 일했는데 좀 쉬는 기간을 왜 갖지 않느냐고 묻는다. 정말 딱 한 달만 자유롭게 쉬고 싶지만, 또 계획 없는 공백기를 가지면 불안한 마음에 쉬지 못할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타고난 조선 노비라고 놀리던 전 동료.. 독일 사회에 세금만 잔뜩 기부하고 떠나는 이여..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감상에 젖을 여유도 심사숙고할 시간도 없다. 의도적으로 감정을 셧다운 하고 있다. 그저 독일에서의 시간과 추억은 좋았던 것으로 간직하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그때 그 설렘에 반짝이던 눈동자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뛰던 가슴이 비록 지금은 색이 바랬어도 아쉬워할 것 없다. 그때의 나도 나고, 그 시간은 내 안에 스며들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까. 아쉬움보단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족 같은 친구들을 만났고, 좋은 동료들에게 배우며 즐거운 회사생활을 했고 젊은 날의 에너지를 가지고 곳곳을 여행하고 경험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말이다.
변화에 잘 대응하는 방법은 시간을 두고 아주 철저한 준비를 하거나, 그 변화의 파도를 타고 올라 그저 흐름에 맡기는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선택지는 후자뿐이다. 게다가 그 변화의 정도가 어떨지는 가봐야 알 수 있다. 출퇴근이며, 업무 방식, 사회 분위기 - 아무렴 내 나라인데, 미리 사서 걱정하지 않고 일단 오늘내일에 집중해야겠다. 독일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순위다. 때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답. 꼬꼬무 걱정요정은 당분간 좀 떠나 있거라. 이렇게 줄줄이 쓰고 나니 막연했던 불안감이 조금 녹아 설레는 맘이 그 자리를 채운 것 같다.
Am Ende wird alles gut. Und wenn es nicht gut wird, dann ist es noch nicht das Ende 란 말이 있다. 끝내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좋지 않다면, 아직 끝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