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r dem Gesetz
코찔찔이 독문학도 시절 썼던 10년도 더된 쪽글들을 올려봅니다. 별건 없고 그냥 순수함이 좋아서요.
법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시골 사내는 일생을 바쳐가며 기다렸던 것일까. 문지기가 문을 닫으면서 작품이 끝날 때까지 법의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오지 않았다. 법은 그저 시골 사내의 염원의 대상이자 문지기가 막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해 국가가 제정한 규칙인, 문자 그대로의 법을 말하는 것인가. 정답은 없다. 다만 ‘법’은 독자가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나의 경우는 법을 내가 겪었던, 겪고 있는 고민과 결부하여 수용했다.
고등학생 때를 떠올려보면 대학이라는 문으로 들어오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기다렸다. ‘대학만 가면 다 잘 될거야.’라는 일념 하에 학교와 집, 독서실만 오가며 여가 활동, 나의 꿈에 대한 고민 등 그 나이에 중요하고 필요한 많은 것을 경쟁 구조와 입시 제도라는 무시무시한 문지기에게 바치며 문 안으로 좀 들어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대학생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왜 이 대학교에 들어가려 하는지, 이 학과에 들어가서 어떤 미래를 준비할 것인지 고민에 앞서, 그저 남들도 들어가고 싶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다행히 <법 앞에서> 속의 시골 사내와는 달리 늙어죽기 전에 문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시골 사내처럼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 기다림을 또 다시 시작한 것 같다. 이번에 내가 들어가고 싶은 문은 취업이다. 동아리 활동이든 취미든 여행이든 연애든 무언가에 푹 빠져서 열정을 불태우고 싶지만 현실의 눈앞에는 학점 관리와 ‘스펙’ 쌓을 준비를 하라고 말하는 문지기가 높은 벽처럼 서있다. 취업의 관문에 들어가기 위해 또 청춘의 많은 것을 문지기에게 헌납하고 기다리지만 취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할지, 내가 무슨 일을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역시 없을 것이다. 그저 내가 저 취업이라는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에만 집착할 것이다.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요즘은 전보다 더 어린 나이부터 공부와 경쟁에 시달리며 기다리기 시작한다. 문지기에게는 더 많이 바쳐야하고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등 떠밀려서 말이다. 20대가 되어서도 많은 대학생들은 뚜렷한 장래희망이 없으면 대세를 따라 고시를 준비하거나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원하는 것의 실체를 모르는 것은 대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달성하고 싶은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도 않을뿐더러 이 문 말고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문이 있지는 않은지 찾아보지도 않는다. 문지기와의 한판 겨루기는 엄두도 못 낸다. 그저 소극적으로 기다릴 뿐이다. 이렇게 보면 무조건적인 인내심은 미덕이 아닌 듯하다.
항상 무언가를 쫓다보면 주객이 전도 되어 쫓는 것 자체에 몰두해서 시골사내와 같은 끝을 맞이하기 쉽다. 시골 사내는 결국 도달하지 못한 채 시력마저 거의 잃고 문틈 새로 희미한 빛만을 보는 데,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오랜 집착으로 인한 맹목적인 추구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시골 사내가 본 빛이 법의 일부였다면 그나마 덜 비극적이지만 법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법이 아닌 밥일 수도 있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추구할 때 무작정 그것 이외의 것을 포기하며 기다리기에 앞서 그것에 대한 충분한 고찰과 탐구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문 앞에 선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늦지 않았다. 문 앞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정말 내가 하고 싶고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그것을 발견 위해 많은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런 노력으로 법을 명확히 파악할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나의 인생은 ‘다른 사람은 입장할 수 없고 오직 나만을 위한 입구’ 이기 때문이다.
내가 카프카의 심오한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고는 자신할 수 없다. 게다가 작품에 나온 요소들과 나의 생각을 A는 A`를, B는 B`를 상징한다는 식의 1대 1대응으로 짝을 맞출 필요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카프카의 짧은 글을 읽고 문학작품을 통해 나 자신을 한번 더 성찰 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2022년에 덧붙이는 말:
매년 나의 새해 소원은 '우리 가족 건강하고, 올 한해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걸 더 잘 알게 해주세요'다. 뭐 하나에 미치는 성격이 아니고 이것 저것 관심이 많아 이 질문은 여전히 나를 따라 다닌다! 그래도 스무살 때 바라던 바처럼 경험하고 질문하며 살아온 듯하여 다행이다.
다만, 오히려 좀더 살아보니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맹목적인 노력', 필요하고 중요하다. 시작하기 전의 why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되 일단 결심하면 못죽어도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