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조용필 55주년 대구 콘서트에 다녀왔다. 올해가 데뷔 55주년이라니. 우리 나이 일흔넷. 공자님 말씀에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무리가 없다던(從心所欲不踰矩) 시기다. 그러나 그는 자기 노래라고 마음대로 부르지 않았다. 중간에 약간의 인사말 정도를 제외하고 스물다섯 곡을 연속으로 부르며 두 시간을 꽉 채운 공연. 거추장스러운 만담이 없었고 불안한 고음을 관객에게 떠넘기는 기교(?)도 없었다. 빈틈없이 잘 짜여진 공연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공연에 큰 감동을 하게 되나 보다. 무엇보다 공연한 곡들이 대부분 가사를 알고 자연스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들이라 함께 노래하고 환호할 수 있어서 흥이 더했다. 이 노래들도 수많은 그의 히트곡 중 극히 일부라는데 놀랐고 그가 아니고 어떤 가수가 이런 공연을 할 수 있을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감동을 빌려 진로 교육의 관점으로 그의 삶과 음악 활동을 짚어본다.
나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음악을 하겠다며 당시 최고의 음악가들이 활동한 미8군 무대로 갈 때만 해도 그에게 온전한 미래는 ‘오늘도 술래’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들처럼 그의 부모님도 음악의 길로 ‘가지 말라고 애원했는데’ 심한 반대가 오히려 큰 집념을 만들어내는 건 비단 로미오와 줄리엣만은 아닌 듯싶다. 그는 처음에 그룹사운드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는데 공석이 생긴 보컬 부문을 하다 보니 결국 더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 점은 크롬볼츠의 ‘계획된 우연’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확실한 방향이 잡히기까지 아마도 ‘아직은 어린가 봐’하는 열린 마음과 태도가 좋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후배들이 그를 높이 사는 건 음악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이다. 솔로 활동에서 밴드 활동으로 음악 영역을 넓히며 최고의 밴드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까지 공연을 함께하는 ‘위대한 탄생’이다. 초창기 그룹사운드 활동이 ‘허공 속에 묻힌’ 날들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은 부친이 아들의 유명세에도 뭔가 달라진 살림이 없어 의심하다가 벌어온 돈으로 고가의 악기와 음향 장비를 구입하는 걸 확인하고 아들을 이해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그에게 최고의 음악을 향한 노력은 ‘모든 걸 다 주어도 잡을 수는 없는’ 정도의 목표였다.
인기만큼 인생이 평탄하지는 않았는데 사별한 그의 아내 재산을 심장병 어린이 재단에 전액 기부(아내가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기에)하고 2013년 포브스에서 ‘아시아의 기부 영웅’으로 선정될 정도로 약 100억 원 이상의 기부를 해 왔다. 공연이 예정되어 있으면 연습할 때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등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치열하지만,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따뜻한 점에서 사람들은 그를 애잔하게 여기며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네 삶이 비록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얼마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지 그의 선행은 진로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한다. 아이들에게도 ‘심장이 bounce 하며 두근대’는 일을 찾게 하려고 노력해야겠구나. 때론 일이 잘 안되어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걸’ 깨달을 때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잠시 쉬면서 ‘하늘에서 빛나고, 구름 따라 흐르는’ 꿈과 추억을 벗 삼아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끝으로 힘든 삶을 이겨낼 수 있는 그의 해법을 남기며 그가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하길 기원한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