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라토닌 Mar 01. 2024

1. 소위 애딸린 이혼녀에게 연애란.

1탄. 사랑은 날 무력하게 해.

"설거지까지 요리고 이별까지 사랑이다."

"만나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




위와 같은 명언은 내가 직면한 이별 앞에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성반응주기에 따른 흥분기, 고조기, 극치기 그리고 해소기의 4단계 과정을 거쳐서 이별을 맞이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에게 더욱 도움이 되었다.


뇌의 구조와 기능을 따져보았을 때 편도체와 해마는 가까이에 붙어있다. 편도체는 불안, 공포를 관장하는 대뇌변연계의 한 부분이고 해마는 기억을 저장하는 기관이다. 이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대한 경험은 해마에 저장되고 다음에 또 닥쳐올 유사사례를 대비하기 위해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게 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날 이후로 갑옷을 하나 둘렀다. 나는 이 갑옷이 따뜻하기도 하지만 많이 무겁기도 하다.  나의 생존본능을 위해 갑옷을 입긴 하였지만 이 갑옷은 흡사 유사한 일이 발생할것 같은 순간에 나를 도망치게 한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속도를 낼 수는 없다.  손에 물을 묻히기는 싫으면서 물놀이는 하고 싶은 그 "두렵고 가려운 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에게 댓가를 물었다.  







연애란 무엇일까. 검색해보았다.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


아 이렇게도 얄팍한 뜻이었다니.  연애(戀愛)에 “애”자가 “사랑”의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연애의 사전적인 뜻은 마냥 유희로 와닿았다. 그래서 그랬었나보다. 우리의 연애는 나같은 고리타분한 사람이 믿었던 사랑은 아니었나보다. 하지만 사랑이란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그렇게 빨리 나에게 올리도 없었다. 사랑이란 건 죽기 직전에나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지 않나. 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와, 연애하려면 성적인 매력을 끊임없이 발산해야하는 거구나.









그 아래로 보이는 “연애”의 다른 뜻을 발견하였다. 바로 "연기와 아지랑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귀다가 연기와 아지랑이 처럼 이내 없어지고 마는 것이 바로 연애인건가?


 








나조차도 애딸린 이혼녀의 연애는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랑은 나를 눈멀게 하고 도파민은 세상을 그저 아름답게만 만들어 놓았다. 사실 사랑이란 게 뒷일을 생각하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써 나는 나 스스로를 불이해의 영역으로 내몰았다.



"이제와서?"라고 하기에는 내 탓도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하기에는 내 줏대가 없었다.



마지막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예의를 다하는 것 밖엔 없었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도 함께했다. 자신의 모자란 점에 대해 사과하는 그에게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생각해보니 예를 다하여 정성스럽게 차례를 지내는 명절도 아니었고 군대가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모성애 그득한 엄마도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어쩌면 나도 이 관계를 불안해 했나보다. 언젠가는 끝날 관계이기 때문에 후회없이 "예"를 다하고 싶었나보다. 이별의 장면을 내가 만들어내도록 했던 그가 미웠지만 이별은 불안함을 함께 가져갔기에.. 그래서 더이상 사랑에 시름하며 잠못드는 밤을 보내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건 고마웠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딸린 이혼녀에게 연애는 총각에겐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건 나를 믿고 따르는 행동이다. 나를 믿고 따르는 행동은 내가 가진 재료에 의해 강화되거나 약화됨을 믿는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이 하는 일은 알고 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싶다.

(아직 정신 못차렸구나 너?)


다음편은 이별의 장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