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겐 마지막, 나에겐 처음인..
아빠와 단 둘이 여행을 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난 어릴 때부터 아빠와의 시간을 엄마보다 자주 가졌던 것 같다. 엄마가 주말에도 일을 하셨기 때문에 아빠와 함께 집안 청소하고 장을 보고 삼겹살을 구워 먹고 했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중학교 1학년때는 아빠와 둘이 캐리비안베이도 다녀왔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감자를 듬뿍 넣어 갈치조림을 해주시던 기억,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아빠는 설거지를 담당했던 기억, 가끔 산에 같이 올라갔던 기억, 대학면접에 버스를 타고 같이 가서 기다려 주셨던 기억, 결혼을 준비할 때 나 때문에 아빠의 자존심을 굽히셔야 했던 기억, 내 목소리에 어딘가 힘이 없으면 바로 알아차리고 무슨 일인지 물으시곤 했던 기억..
이혼 후 나는 작은 결심을 하였다.
매년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하는 것..
어느덧 세 번째 제주 여행을 마쳤는데.. 어느 날은 갑자기 한라산에 가보고 싶었다. 마땅히 갈 사람도 없고 “등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아빠와 나의 첫 한라산의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아빠와의 1박 2일에는 다른 가족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요일엔 언니가, 월요일엔 엄마가 딸을 케어해 주었다. 내가 쉬려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하고 또 내가 자리를 비운만큼 흐트러진 것을 다시 정비해야 하기에.. 언제부턴가 긴 여행은 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빠 잘 모시고 다녀올게!”라고 하기엔..
이번 여행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비행기표와 호텔예약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케어가 필요한 아빠의 어린 딸이었던 것이다.
“등산복은 있니?”
“스틱은?”
“등산 가방은?”
“신발은?”
“가기 전에 계단 오르기 하면서 워밍업을 해야 해”
나의 10년도 더 된 등산복과 운동화를 주섬주섬 챙기고.. 스틱과 가방은 아빠가 따로 챙겨 오셨다. 그 외에 보온병, 견과류, 사과, 오렌지, 생수, 초콜릿, 우비, 우산.. 마치 벽돌 몇 장은 들어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무거운 아빠의 등산가방을 보고.. 뭐 이렇게 이고 지고 가나.. 생각이 들었는데 등반을 마무리하고 생각해 보니 아빠가 아니었다면 한라산은 불가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첫날인 일요일에는 협재해수욕장 앞 카페에서 느긋하게 쉬고 저녁에는 장위동 유성집 제주점에 가서 소고기로 단백질을 채웠다. 협재해수욕장은 여전히 참 예뻤다. 제주의 모든 해수욕장을 다녀본 건 아니지만.. 예쁜 색감의 물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볍고 시원해졌다. 아빠는 바다보다 휴대폰 속 야구경기를 더 많이 보셨지만 이곳, 여기, 제주에 함께 와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제주에서의 1박은 롯데시티호텔에서 보냈다. 가격도 합리적이고 4성급 호텔이라 룸 컨디션도 좋았다. 저녁에 체크인을 해서 새벽 4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은희네 해장국에서 이른 아침을 먹었다. 전날 소고기 양껏 먹었기 때문에 해장국이 넘어갈까 했는데 아빠가 든든히 먹고 출발해야 한다고 해서 못 이긴 척 한 숟가락 넘겼는데 웬걸 너무 맛있어서 다 먹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나이가 들수록 어른들 말씀은 다 깊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성판악 코스를 선택하여 새벽 6시부터 산행을 시작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고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아서 우비를 입었다. 더욱 거세지는 빗줄기.. 아직은 완만하지만 완주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을 입 밖으로 내면 더 힘들어질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코로 짧은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긴 숨을 내쉬며 묵묵히 걸어 올라갔다.
4Km의 다소 완만한 경사의 길을 걸아와 첫 번째 대피소인 속밭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고 다시 우의를 챙겨 입었다.
그리고 3.2Km를 더 올라와 두 번째 대피소인 진달래밭대피소에 들렀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사를 했는데 우리도 챙겨 온 컵라면에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부어 아주 맛있게 먹었다. 쓰레기는 따로 버릴 곳이 없기 때문에 깔끔하게 라면을 비우고 거세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내 발만을 보며 끝이 어딘지도 모르게 계속해서 올라갔다. 우비를 입었지만 다방면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내 옷 빈틈을 찾아 들어가는 바람에 속에 있는 옷까지 젖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비와 바람이 거세졌다. 몸이 휘청거리기도 했고.. 아빠는 내 뒤에서 오셨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한쪽 엉덩이 뼈에 약간의 통증이 있으셨다고 했다. 나는 내가 뒤쳐지면 아빠가 신경을 쓰실 것 같아서 나름대로 열심히 올라갔던 건데.. 이번 산행에서는 아빠의 체력이 예전만큼 못하는구나..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좀 짠했다.
아빠는 산행 전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이번이 마지막 한라산이네..”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슬퍼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또 올 수 있지!라고 쉽게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 아빠! 나도 마지막일 수도 있어! 너무 힘들 것 같은데??” 하고 헛헛함을 나름의 농담으로 넘겼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올라가는 것에는 목표가 있어서 그런지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급격히 낮아진 온도와 바람 때문에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던 게 더 힘들었었고 저 백록담 바위에서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기다렸던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진짜 산행은 하산길에 있었다.
올라왔던 코스 그대로 내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반대편 관음사 코스를 통해 내려오게 되면서 길어진 산행시간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통증이 전달되면서 체력적인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추위는 누그러졌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돌길과 하산길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갑자기 나타난 오르막길로 성질이 나기도 했다. 산을 좋아하시는 아빠도 “뭐야~ 또 돌길이야? “ 하시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10시간 40분이 걸린 한라산 등반.
나중에는 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발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스틱은 목발이 되었고 다 내려와 밟는 아스팔트 땅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르겠다. 힘들긴 했지만 다치지 않고 무사히 완주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날의 기록은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극심한 통증이 온다리에 집중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근육이완제 한통을 다 비우고 종아리에 파스를 붙이고 잤다. 왜 사람들이 한라산 등반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것 같았다.
쉽게 얻어진 행복은 쉽게 잊힐 가능성이 있기에..
어쩌면 의도적인 힘듦을 만들어 추억을 만든 감이 없지 않지만 그렇기에 아빠와 나는 할 말이 더 늘었고 아빠와의 추억이 그토록 숨찼던 나의 호흡과 심장에 그리고 근육에 고스란히 배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또 나에게 우비를 입혀주고 작은 우산을 들고 앞서 갔던 아빠의 둥글고 다소 굽어진 어깨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