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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공작 Mar 11. 2022

#기울이다

한입거리 로맨스

오랜만에 너와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십년지기였지만 떨어져 지낸 시간이 붙어 있는 시간보다 길었다. 고등학교 때는 다른 반, 학원은 다른 요일. 심지어 대학 4년 간은 각각 서울과 부산에서 보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하지만 내가 너를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생각하고, 너는 누구든 스스럼 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짧은 인연이 10년이나 이어지게 되었다. 이번에도 먼저 부산에서 취직한 네가 출장차 서울로 온다고 하여 만들어진 자리였다. 졸업하자마자 취업했다는 소식은 부모님께 들었다. 축하한다고 연락할까, 말까. 초라한 지금의 내 모습을 보이기 싫으면서도 빛나는 지금의 너를 보고 싶었다. 오락가락하던 마음이 너의 연락 한 번에 한 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너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는 성숙해져 있었다. 검은 롱 코트에 검은 슬랙스, 그리고 검은 구두. 올 블랙인 줄 알았더니 바람이 불 때마다 코트 안쪽의 회색 니트가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은 되게 춥네. 더 따뜻하게 입고 올 걸 그랬어."라는 말과 함께, 너의 입김이 노을 사이로 퍼져나갔다. 일단 이거라도 받아, 하고 주머니에 쟁여두었던 핫팩을 꺼내 손에 쥐어줬다. "센스가 늘었네?"라고 말하며 너는 핫팩을 받아들고는 볼에 그대로 갖다대었다. 남아있는 온기를 간직하려, 나는 그대로 주먹을 쥔 채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언제까지고 붙들고 놓아주고 싶지 않은 따스함이었다.




"배고픈데, 뭐 먹을까? 서울 맛집 아는데 있어?"



그동안 네게 서울에 대해 아는 척을 실컷 했지만, 도서관, 기숙사, 그리고 강의실의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대학 생활 내내 표류한 탓에 나는 맛집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떡볶이 싫어하는 여자는 없지. 아니지, 남녀 둘이 보는 거니까 양식이 좋으려나. 이왕 서울에 왔으니 부산에서는 쉽게 못 먹는 이국적인 요리를 먹으러 갈까. 틈틈이 가게 이름을 하나, 둘 씩 목록에 적을 때마다, 너와 만날 날이 다가온다는 설렘과 불안이 마음속에서 쌓였다. 그리고 드디어 너를 만나, 목록이 담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오랜만에 삼겹살이 먹고 싶은데, 어때?"



하필 삼겹살이라니. 먹을 줄은 알지만 구울 줄은 모르는데.



"좋아, 좋은데, 잠시만 기다려봐."



서울의 온갖 맛집을 꿰뚫고 있는 친구에게 재빨리 SOS를 쳤다. 나중에 같은 곳에서 밥을 사는 조건으로, 친구는 직원이 구워주는 고기집을 소개해줬다. 다행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추천 받은 가게가 있었다.



"불금이라 자리 없을 줄 알았는데 테이블 몇 개 남았대. 가자."


"너 길치잖아. 가게 가르쳐 주면 내가 앞장설게."


"나 서울 생활 벌써 5년차야. 우리 고향 동네보다 서울을 더 잘 알걸? 그리고 이런 건 도착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야 기대가 되는 법이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래도 가다가 헤메면 바톤터치 하는 거다?"


"알겠다, 알겠어. 일단 맡겨봐."



그리고 정확히 10분을 헤매다, 네게 가게 이름을 가르쳐주고 대신 안내를 부탁했다.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 자리에 앉자, 그녀는



"그러길래 진작에 누나한테 맡기지. 그래도 덕분에 고기 잘 들어가겠다. 당연히 이걸 노린거지?"



하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하지"라고 뻔뻔하게 답하며 술을 시켰다.



"오늘의 수치는 마시고 잊어버려야지!"


"기록으로 남겨둘껀데?"



하고 히죽대는 너의 입가의 미소를 보며, 하굣길에 나를 놀리던 너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것들과,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들. 바뀌었으면 하는 것들과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그 사이에서 심장이 거세게 드뱅잉을 했다.




우리는 떨어져 지낸 시간에 비례해 따라잡아야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서로의 삶의 궤적을 공유하는 일은 즐거웠다. 취업준비, 대외활동, 동아리, 학과 전공공부, 그리고 연애. 평행선을 달리는 줄 알았던 너와 나의 인생은 시공간을 초월해 수없이 많은 곳에서 만나고 있었다. 불판 위에서 고기와 함께 익어가는 접점들을 안주 삼아, 우리는 마시고 또 마셨다. 언제나처럼 마무리는 학창시절 이야기였다.



"그날 둘만 수학 보충수업을 같이 들었잖아. 학교에서 소문만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니까 더 범생이 같더라."


"아 그러셔. 근데 말은 왜 걸었냐?"


"너 같은 범생이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걸까 궁금해서."


"너무하네. 범생이들도 사람이야. 24시간 365일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고."



그때도 그렇게 대답했지 아마, 하고 너는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싫지 않았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질문 세례 당하면 보통 피하던데."


"질문을 받았으니까 답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


"성실하다, 성실해."


"사실 질문에 답해줄 때마다 과자를 주길래, 똑바로 답 안해주면 과자 못 얻어먹을 것 같아서."


"그럼 그게 다 과자 때문이었다? 마셔."



하고 너는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사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갈 수 있는 네가 부러워, 친해져서 그런 점을 본받고 싶었다. 하지만 너에 대해 알아갈수록 너를 따라한다고 네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었다. 떡볶이가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며 학원을 째달라고 하지를 않나, 모처럼 공부할 마음이 들었으니 자정까지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다 집까지 바래다달라고 하지를 않나. 너의 제멋대로인 삶의 방식이 정도만을 걷는 나에게 맞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너의 부탁을 거부할 수 없었다. 너는 너무나도 자유로웠고, 나는 너와 너의 자유로운 삶을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으니까.



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어. 술기운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심을 겨우겨우 털어넘겼다.




"슬슬 일어날까? 너 너무 많이 마셨어."


"하나도 안 취했거든, 잔이나 받아!"



하고 대답하며 너는 소주병을 들었다. 이내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 병은 테이블 위로 떨어졌고, 구르며 반쯤 들어있던 내용물을 울컥울컥 토해내었다. 깜짝 놀라 병을 도로 세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 술이었다. 놀란 덕분에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너는 미안하다며 배시시 웃고는, 술이 조금 약해진 것 같다며 덧붙였다. 효율 높은 걸로 동네에서 유명했으면서 무슨 말이냐고 투덜댔지만, 그래도 귀여운 변명이었다.



코로나의 여파 때문일까, 가게 밖은 이미 어둠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지직거리며 옅은 존재감을 내뿜는 네온사인의 불빛에 의지해, 우리는 너의 숙소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너의 꼬일대로 꼬여버린 스텝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나, 안, 취, 했, 어." 네가 내뱉는 단편적인 음절들과 구두의 또각또각 소리가, 너를 에스코트하느라 지친 나의 한숨소리와 한데 맞물려 밤거리에 울려퍼졌다.



"자, 손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호텔이 근처여서 천만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사이좋게 다음날 길바닥에서 동사한 채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하고 꾸벅 인사하고 다시 고개를 들려다 균형을 잃고 내 품에 뛰어든 너.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놀라 미처 반응하지 못한 나. 우리는 포개어진 채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네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어오자 고이 담겨있던 나의 마음이 네게로 속절없이 흘러넘쳤다.



이미 기울어버린 나의 연심을

네가 귀 기울여 듣지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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