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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라헬 Nov 02. 2023

저믐의 미학

라헬의가을

(의 미학

강 라헬     

    '황혼이 물든 길 위에 슬픔 하나를 던진다.

    교차로에서 붉은 신호등에 걸렸을 때 또 하나의 슬픔을 버린다.

    저무는 것들의 시간 

    외출 나갔던 내 영혼이 나를 향해 들어오는 시간‘   (작가 미상)  


     하루를 마감하는 시각 오후 6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나는 서있다. 길 건너 신호등의 빨간불과 눈이 마주쳤다. 이어서, 저 멀리 아차산등성이에 저물려는 석양의 해도 눈에 들어온다. 해는 하늘보다 산에 가깝게 떠있다. 온종일 자신의 온몸을 태우며 눈물을 흘린 대가로 세상의 빛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동그란 몸뚱이. 그는 지금 어떤 생각으로 그곳에 떠있을까.

   어서 져야지, 빨리 지고 싶다. 아니, 아직은 아니라고 중얼대며 공중에 걸려있는 황혼의 해와 눈을 맞춘다. ‘그래, 해야 나는 니맘 알아, 그런데 너도 내맘 아니.’라고 물으면서. 저물어야하는 시각인데, 아쉬움에 아직은 아니라며 여운을 남기는 일몰의 기다란 주홍빛띠. 잠깐의 동지애를 느껴보지만 순간 교만의 맘을 접는다. 그것은 나와는 달리 내일도 또 그 다음날에도 뜨겠지만, 나의 모두는 창조주에게 속해있지 않은가. 해의 한결같은 모습,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그 기세가 늘 부러웠다


.  여럿의 기쁨과 여러 개의 슬픔을 공기 중에 퍼트렸던 오늘. 이른 아침부터 늦은 이 시각까지 동동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기웃댔다. 병원 도서관 헬스장. 그렇지만, 이렇다 할 소득과 결과도 없다. 다만, 시간 죽이기에 어쩔 수없이 동참 되어지는 반복되는 일상이니까. 그것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각엔 여지없는 건조함으로 온 몸뚱이에 퍼진다. 오늘은 그 건조함에 아직 시작도 안한 장마의 축축함까지 더하니, 안쓰러운 청승이 온 몸에 스민다. 곧, 장마의 시작과 함께 한해의 반을 접고 새달을 맞아야하기 때문 일 테다. 

   유월의 마지막 날. 장마가 시작됐다. 아침부터 장대비는 땅을 후벼 파고 비닐하우스지붕을 후려친다. 내 작은 창가 밖 소나무와 감나무는 강한 바람에 온몸을 떤다. 밖에서 나는 모든 소리들이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나를 나무란다. 그것은 그들만의 생존의 몸짓이며 살아있음의 울부짖음 일 테니까. 


  어느새 구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덮어놨던 글의 이음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찐한 희열과 소름까지 돋았음을 토로한다. 끝내지 못한 ‘저뭄의 미학‘을 기억하게 했고, 저장했던 글을 꺼냈다. 쓰던 글을 끝내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던 글이었으니까. 특별히 애정을 가졌던 제목과 내용이었음에도 생각이 막히고 심장이 닫혀서 이어갈 수 없었던 글이었다. 시월 글제에 고마움을 듬뿍 안긴다.

   여전히,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반복되는 지구에서의 나의 날들.  이제 나는 아름다운 황혼 길에 첫발은 내디딘다. 늦은 감이 없진 안치만, 내게 선물로 지워진 아름다운 짐을 지고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가려한다. 내가 품은 세 개의 바람들과 함께 할 테니 두려움과 불안함도 접을 테다.


   참는 것만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혼자 짐을 지는 것이 신이 허락한 내 삶이라고 생각했기에. 또한, 그것만이 불행을 피하기위한 길이라고도 생각했으니까. 이제야 그 생각이 교만이었고 세상에서의 욕심을 부추겼던 핑계였음을 요즘 부쩍 느낀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했어야 했는데, 그때 내 곁엔 어린 아들들 뿐이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내겐 비빌 언덕이 전무 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내게는 비빌 언덕도 생겼고 신이 지워주신 아름다운 짐도 있다. 맡겨주신 짐을 지고 황혼의 길을 갈수 있으니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 길은 문학의 길이고 아름다운 짐이란, 나를 닮은, 나밖엔 쓸 수 없는 내가 써야만할 글들일 테니까. 내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짐을 맡기신 신. 문학의 길을 활짝 열고 용기를 주며 손잡고 함께 길동무 해주시는 문우님들. 그 분들께 부족하지만 선하고 따듯한 내 마음을 한 아름씩 안긴다.


   글 시작에 쓴 작가 미상의 시는, 삼십 여 년 전 뉴욕에서 우연히 찢어진 신문조각으로 조우했다. 처음 만났을 때,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사십대 중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난 문장은 내 기(氣)를 죽였고 눈물을 뚝뚝 흘릴 만큼 동질감도 느꼈으니까. 교만스럽게도 그때가 나의 황혼이라고 생각했고 그만큼 힘들었을 때임을 고백한다.

   ‘저무는 것들의 시간, 외출 나갔던 내 영혼이 나를 향해 들어오는 시간’ 시 마지막 문장처럼, 외출했던 내 영혼이 내게로 들어 왔음에, 격한 입맞춤과 뜨거운 포옹을 한다. 이제야 들어와 나의 황혼 길을 아름답게 걷게 하는 내 영혼. 내가 그리는 바람들과 함께, 신이 만드신 반듯한 길을 뿌듯한 짐을 지고 가려니 발걸음이 이토록 가벼울 수가.


   난‘맘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준다. 말로, 글로 언제나 나를 위해 살겠다고 수없이 많은 약속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은 걱정하지도, 일어나도 별거 아닌 걱정들 때문에 고운 황혼 길을 포기할 수는 없을 테다. 다만 신이 허락한 아름다운 시간 속에서 마음껏 바람을 누리며 저뭄의 미학에 흠뻑 빠져보련다.






시드니 하버브리지의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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