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들어 두 번의 함박눈이 내렸다. 그 두 번의 눈은 그야말로 나의 지경(地境)을 설국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저녁 즈음, 깜깜한 하늘에서 내리는 첫눈은 회색 빛 가슴속을 씻겨주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함박눈의 모양새로 내게 내린 밤눈은 헝클어진 내 마음을 홀리기에 한 치의 모자람 없었으니까.
내가 터를 잡은 동네는 인적이 드물어 더욱 고요하다. 도심 속의 시골이랄까. 첫눈 오던 날 길 건너 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함박눈이 오신다고. 아파트 놀이터는 눈 마중 나온, 어른 아이들 모두가 뛰며 소리치는 한바탕 마당놀이라고 전하는 목소리엔 그녀의 달뜬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모두는 눈이 온다는 이유만으로, 걱정도 잊고 시름도 아랑곳 않고 즐겼으리라. 잠깐이지만 몸과 마음의 아픔까지도. 맞다! 우리 모두에겐 뭔가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생각지 못했던 선물 같은 것. 그날 내린 함박눈은 엄청난 선물이었다. 모두의 입가엔 내리는 눈만큼이나 풍성하고 흐뭇한 미소가 번졌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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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밤, 안개꽃처럼 내리는 첫눈은 새 각시마냥 고왔고 순수했다. 눈은 내게 밤 마실 을 부추겼고 꿈꾸듯, 홀린 듯 눈밭으로 나갔다. 깜깜한 동네에 드문드문 서있는 키다리가로등이 뿜는 불빛 아래로 수많은 눈송이가 춤춘다. 춤사위는 강하지만 곱다. 이제껏 말 못했던 속내를 토해내듯, 흥(樂)인지 한(恨)인지 모를 추임새로. 눈밭으로 나가는 내 입가엔 실로 오랜만에 입이 귀에 걸렸다. 삽시간에 쌓인 눈은 비닐하우스지붕과 길까지 덮고 품으며 도도하게 내려온다. 속삭이듯 고운 춤을 추며.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절로 입 밖으로 흐른다. 별 대신 눈이라는 소리로. 그만큼 밤눈은 찬란한 빛을 발하며 보드러운 솜사탕처럼 내리기에 그 수를 헤일 수 있을듯했으니까. 눈 하나의 추억과 눈 하나의 사랑과~ 눈 하나에 아들들.
인적 드문 이곳에 내리는 눈은 고스란히 모든 것을 덮는다. 비닐하우스의 고장 난 문짝과 그리움으로 까만 내 마음까지. 하얀 나라는 황홀하다.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조심스레 첫발자국을 찍는다.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기분이 이랬을까. 그리고는 수없이 많은 발자국의 뽀도독 소리를 공중에 날리며 강아지 마냥 뛴다. 억새풀 날개를 달고 마른 들꽃 화관을 쓴 꼬마 천사눈사람도 만들었다. 첫눈위에 발자국을 찍은 인생사진도 남겼다. 어느새 달달한 흐뭇함이 회색빛 가슴으로 들어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알 수 없는 먹먹함과 그리움이 눈 숫자만큼이나 가슴에 내리는 연유는 무엇이려나.
두 번째 눈은 한낮에 내렸다. 이번에도 탐스런 함박눈이다. 내 마음을 헤아리는 하늘이 선물을 또 보내시나보다며 바깥을 살핀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네는 고요하고 적적하다. 아이들의 수선스런 목소리까지 그리울 정도로. 또 눈밭에 나가 첫발자국을 이곳저곳에 남긴다. 예쁜 눈사람을 만들고 싶은 생각을 접고 곧 들어 왔다. 몇 안 되는 동네사람들이 ‘저 여자는 눈 만 오면 머리에 꽃을 꽂나봐’라고 흉볼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하긴, 노년의 여자 혼자 대낮에 눈사람을 만드는 모양새는 내가 생각해도 민망한 광경이기에. 훌훌 눈을 털고 들어와서 커피를 내린다. 문득 내가 살던 동네를 떠올려본다. 순간, 파노라마처럼 눈 오는 날의 먼 기억들과 조우한다. 그 추억은 한가득 가슴을 따듯하게 데운다.
그곳의 눈은 대단하다. 이곳의 눈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물론 도심은 눈이 쌓일 틈조차 허락지 않는다. 그만큼 제설작업이 완전하니까. 허나, 외곽에 있는 집들은 눈으로 인해 며칠씩 갇혀 있기도 한다. 나처럼 혼자인 집은 누구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문을 열수 있을 때도 있기에
뉴욕, 우리 집이 있는 곳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마을처럼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거기나 여기나 혼자이긴 마찬가지. 그러나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며 마시는 커피의 맛도 느낌도 전혀 다르다. 그 곳, 눈 내리는 날은 한 아름의 아늑한 평화로움과 벗하며 진정한 휴식을 누린다. 아들이나 정원사가 눈을 치우러 올 때 까지 느긋함을 즐기기만 하면 됐기에. 아들이 엄마를 구출하기위해 눈 치우러오는 날, 집안은 맛있는 한국의 냄새가 풍요롭게 퍼진다. 아들이 원하는 엄마 표 음식은 냄새부터 그들의 오감을 깨우기에 충분하다. 그날, 그들이 원하는 대표 메뉴는 당연히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여야 했기에. 오기로 한 전날부터 그들을 먹이기 위한 음식마련은 시작된다. 때문에 갇혀있어도 행복하다.
허나, 지금 눈 오는 창밖을 볼 때 느낌은 그저 안타까움과 외로움이다. 아마, 나이 듦의 과정이라기보다 피붙이를 향한 그리움 일 테다. 급히 그리움을 잡아 안고 김치찌개를 끓인다, 그리곤 그날의 냄새를 소환한다. 그런데 냄새도 느낌도 다르다. 이런저런 상념을 애써 접으며 더 동그라진 등을 토닥인다. “괜찮아, 괜찮지?” 하며. 마음속으로 감사와 평안이 살며시 들어온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한 가득,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