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중국에서 시작되어 지난 2년 반 동안, 전세계 인구 중 5억명가량을 감염시키고, 약 600만의 목숨을 앗아간, 21세기 최악의 팬데믹, COVID-19.
호주라는 섬나라 특성상 국경을 전면 봉쇄하는 것이 가능했기도 하고, 호주에 본격적으로 대유행하기 전 국제공항이 없는 이 도시로 이사온 우리 부부는 불과 1년 전까지만해도 마스크도 쓸 필요조차 없어 이 지긋지긋한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국에 코로나 환자 몇만명이 나왔다더라, 후유증이 심한 사람들이 있다더라 하는 뉴스를 봤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내가 아는 사람 그 어느하나 걸린이가 없었다. 물론 이건 알고보니 시간문제였던 거였다.
우리 부부가 국제선도 뜨지 않는 매카이로 이주한 것은 2020년 1월이었다. 남편은 그때 함께 일하던 오너가 이 평화로운 소도시에 가게를 오픈하기로 해, 남편은 매니저 직책으로 나는 셰프로 함께 지역이동을 했던 거였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작은 소도시에는 그럴싸한 레스토랑이 적었고, 비교적 부촌에 속하는 곳이라 돈을 쓸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 넘쳐났다. 바로 이전에 살던 케언즈가 교화가 되지 않은, 거의 원시에 가까운 원주민들에 의한 사건사고가 적지 않았음을 감안할때 이곳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때 이사와 지금까지 지내고 있는 집도, 작은 타운하우스에 속해있어 매우 안전한데다가 이웃들도 상냥하고 친절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케언즈에 속한 관광지인 팜코브란 지역에 사는 동안 사귄 몇몇의 친구들이 --'친구'가 꼭 동년배일 필요는 없지요. Mick과 K는 부모님 연배였으니까...-- 매우 서운해했던 것을 제외하면 나는 이 동네가 퍽 마음에 든다.
마치 재앙이 피해가기라도 하는 듯, 작은 도시로 이주해 거의 반 고립 상태에 놓인지 몇 달 되지 않아 전세계가 코로나로 인해 직격탄을 맞았다. 그래도 동방의 작은 내나라는 초기에 방역을 잘한탓에 비교적 안전한 축에 속했고, 호주도 시드니나 멜버른 같은 큰 도시는 약간 영향이 있었던 것 같지만 우리동네는 마스크도 불필요했다. 퀸즐랜드 주지사가 꽉 막힌 사람인 덕에, 우린 아주 큰 감옥에 갇힌 채였지만 마스크로부터 자유를 누리는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황사가 심한 내나라는 마스크를 끼는 일이 흔했던 모양인지 아빠는 몇번을 보내줄까하고 물었지만, 항공도 없는데다 선박으로 배송받을 경우에는 마스크를 받고나면 왜인지 코로나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질거라 생각했었다. 그랬었다.
내가 이 대재앙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지난해 3월 경부터였다. 내 여권만료가 더이상 미룰 수도 없이 임박해있었으므로 나는 영사관을 반드시 방문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영사관이 없다. 여행 삼아 시드니에 가도 되지만, 그당시 나는 온갖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알수없는 염증을 느낄때라 친구들과 약속하는 일도 번거롭게 느꼈던 것 같다. 그나마 시드니에 있는 영사관이 한달에 한번정도 브리즈번을 방문하는데 그때 맞춰 볼일을 보면되었다. 방문영사는 아무래도 짧은 기간을 운영하기 때문에 이용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예약을 받는듯했고, 남편과 콧바람이나 쐬이자며 방문영사도 예약하고 비행기도 예약했다. 오랜만의 여행에 비행기도 뜨기전에 기분이 먼저 방방 뜨더라. 너무 기대한 탓이었을까.
브리즈번 행 비행기를 타기 7시간 전쯤 영사관으로부터 긴급한 문자와 이메일을 받았다. 3월 말 브리즈번에서 확진자가 나왔고, 몇일간 락다운이 될거라는 기사를 봤지만 큰 영향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추가 확산을 막기위해 시드니에서 출발하는 방문영사는 무기한 연기될 예정이라는 이메일이었다. 때는 뉴스에서 브리즈번 시티내의 식당도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했고, 이런 상태로라면 우리는 방문영사는 커녕 외식도 못한채로 브리즈번의 호텔에서 3일이나 체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말이 체류지 감금이나 다름없었고, 이미 가는 의미 자체가 사라져버렸으므로 잔뜩 화가 난 채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시드니에 사는 친구도 어이없어하며, 그러게 차라리 시드니 여행을 오지 그랬냐며 안타까워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두 달 뒤 시드니행 티켓을 끊었다. 이미 있는 영사관 문을 닫지는 않겠지 싶은 마음에. 설마 별 일 있겠어하는 마음에.
이 여행이 바로 그 여행이다. 임신사실도 모르고 시드니의 지인들과 약속을 잡아, 먹고 마시고, 온 시드니 CBD를 활보하고 다녔던, 숙취때문에 잠이 쏟아지는 줄로만 알았던, 집으로 바로 돌아오기 전날 갑자기 락다운이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해 오도가도 못하고 브리즈번 격리 호텔에 2주간 갇혀있어야 했던, 얼떨결에 금주를 시작한 채로 임밍아웃 당한 그여행.
내가 시골살이로 코로나로부터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동안 시민의식이 강하다 자화자찬하던 대한민국의 방역에도 조금씩 틈이 생겼다. 신천지로 의심되는 종교집회로 인한 확진자 확대, 이태원 클럽의 불법영업으로 인한 깜깜이 환자를 시작으로 이 병원덩어리는 확산되었다. 조금 소강되는가 하는것도 잠시, 델타변이의 확산으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더니 더이상 확진자를 위한 병동도 없다했다. 인구가 5천만정도 일텐데 연일 몇만명의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국민이 모두 걸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항간에는 몇십년 뒤에 378번째 부스터샷을 접종할거라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 유럽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다고했다. 인도에서 발발한 델타 변이 바이러스는 치사율이 높고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고했다. 각 도시내 확진자 몇만명은 우스운 숫자였다. 두려웠다. 혹시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혹시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잃을까봐.
특히 임산부들에 관한 뉴스는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코로나 확진을 받은 임산부를 위한 병동이 없어 경기 사는 여자가 헬리콥터를 타고 여수에 가서 출산을 했다고도 했고, 이 질병때문인지는 확실치 않겠지만 산모가 코로나에 걸려 뱃속의 아기를 잃은 비보도 들려왔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을 예방접종이 안전한지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접종을 맞고도 더러는 코로나 확진자가 되었고, 접종의 후유증으로 시력이 저하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임산부에게 접종을 권고하고는 있지만 아무도 백퍼센트 안전을 보장해 줄수는 없으리라.
산후조리는 남편과 둘이 해야했다. 출산일이 다가오는데 엄마가 결국 오지 못했다. 엄마는 혹시라도 긴 여행 동안 자신이 우리에게 병을 옮길까 우려했고, 우리는 환갑이 넘은 엄마가 고생길이 훤한 호주행을 택했다 무슨 일이 날까 두려웠다. 만삭의 나는, 경유까지 서른 몇 시간을 걸려 한국에 갈 용기도, 남편이 없는 곳에서 아기를 낳을 생각도 없었다. 산후,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 같은 호사는 누려보지도 못했지만 잘한 결정이리라 스스로를 다독였었다.
호주에서도 검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PCR 검사는 고위험군이 아닌이상 우선순위로 받을 수 없어 다들 자가키트로 검사를 했다. 이걸 갖고 사기치는 인간들이 수두룩한 것 같았다. 본인은 음성이어도 동거인이 확진되었다고 하면 일주일 병가를 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검사를 받기만해도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무급이던 유급이던 휴일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악용했다더라.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야 하는 남편의 직업 특성상 우리도 안전지대에 있지만은 않았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하나둘 확진 판정을 받았다. 동료의 확진에 남편은 쉬는날에도 불려나갔다. 유일한 위안은 가족모두가 코로나에 걸려 고생을 했지만 돌쟁이만은 멀쩡하더라는 증언뿐이었다.
sns에 내가 아는 사람들도 확진 소식을 전해왔다. 친구의 아버지가 입원중이신데 무지한 병원 동기가 밖에서 걸려와 독방 신세를 지게 되셨다고 하더니, 친구, 친구 남편, 친구 남편의 어머니까지 줄줄이 확진을 받았다고 했다. 시드니에 친한 동생은 여행을 갔다가 남편이 식중독에 걸려 급히 돌아왔는데 돌아와서 검사하니 코로나였다고 한다. 부산에 사시는 시아버님이 확진을 받으셨다. 그리고 엄마가,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다들 번호표 뽑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다들 심한 감기 같았다고 말했다.
코로나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델타변이가 지나가고 상대적으로 경미한 오미크론이 유행하자 전세계는 위드코로나라는 타이틀로 가는 중이다. 한국은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 방향으로, 호주는 이미 병원이나 약국, 공항을 제외하면 노마스크로 외출이 가능하다. 관광 상품들의 광고도 부쩍 늘었다. 멀리 떨어진 인연들을 만나러 하나둘씩 비행기도 예매한다.
여기도 국경이 열렸다. 입국이 까다롭긴하지만 워킹 비자나 학생 비자 신분으로 호주에도 입국자가 늘고 있다. 독감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지만 모두가 심각성을 생활로 경험하지는 않았듯이, 코로나도 독감 같은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 코로나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빼놓기 어려운, 수많은 개인 사업자들의 고충도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고는 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어쩌면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이 질병에 대해 우리는 조금은 무뎌졌다. 올 10월쯤 엄마가 올까하는 대화가 오고갔다. 이제는 코로나가 아니라 엄마의 의사소통 걱정을 먼저 하게 된 지금, 나는 조금 설렌다.
이제는 괜찮다 하는 희망을 걸어보며, 아직은 무사한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모두의 안녕을 바라본다.
코로나로 인해 생업을 버려야만 했던 분들,
가족을 잃은 분들, 투병 중에 갖게 된 평생의 고통을 안고 가야 하는 분들께
비통한 마음으로 위로를 전합니다.
이 질병과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계신 방역당국 여러분, 의료진에 감사와 격려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