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초산 임신과 출산이야기
주변에서 말했다. 열달 간 아기를 품었던 엄마와는 달리 아빠의 사랑은 갑자기 치솟지 않는다고.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열달이나 고생하고 출산의 고통을 오롯이 겪으며 아내가 아기를 낳으면, 남편에게서 '부유'가 나와 젖을 물리는게 공평한 것 아닌가. 나는 자연의 섭리를 도통 모르는 무지한 엄마였다.
함께 업로드 된 사진은, 출산 직후 아빠 품에 안겨 엄마 수술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집 작은 천사입니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로 돌아와보니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아기를 안고있던 내 남자가, 위풍당당하게 결혼식장을 들어오던 때만큼이나 멋지더라구요.
나는 K장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자의 반 타의 반 장손녀를 사랑하기만 할 수는 없었던 우리 조부모님과 달리, 아빠는 나를 무척 아꼈다. 체구가 작고 마른 엄마가 안기엔 나는 너무 우량아였던 탓인지, 내 어릴 적 사진은 죄다 아빠 품 속이었다. 아빠 품에 안겨서 자고 있거나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인상짓고 있거나 아빠 무릎 앞에서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얘기만 들어도 사는게 고단했을텐데 아빠는 나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쉬는 날이면 마로니에 공원에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어 주었고, 올챙이를 주워다 키우게 해주었고, 그 개구리를 놓아주러 근처 대학의 공원에도 갔으며--혹시 이게 생태계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지금은 아마 없어진 듯 한 드림랜드에도 데려가곤 했다. 세식구 모두 놀이기구를 탈 사정을 못되었지만 --돈도 없었지만 엄마는 멀미를 하고 아빠는 나를 안고 있고 나는 너무 어려서.-- 지금 사진 속 우리 셋을 보면 한글을 모르는 이도 '행복'이란 단어의 뜻이 뭔지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진 속의 나는 엄마에게만큼 아빠에게도 몹시 귀한 대접을 받았다는 걸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딸이 귀한 것과는 별개로 아빠는 아이들을 몹시 사랑하던 사람이어서 내 생일에 사촌동생 사진만 잔뜩 찍어놓고 생일 케이크 초까지 불게 해주라고 하는 바람에 심통이 났던 적도 있지만 나는 아빠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 뿐인 아빠 딸이다.
아빠는 특유의 성미때문에, 남 밑에서 일하는 것을 어려워했던 것 같다--그리고 피는 물보다 진해서 아빠를 꼭 닮은 딸...--. 아버지 자신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은 허용하지 않는 분이고, 내가 나이들며 사회생활이란 것을 해보니 윗사람들은 대체로 권위를 이용해 터무니없는 명령을 해대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빠에게는 내가 그렇듯,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분리가 필수였던 듯 싶다. 나는 회사에서 동료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 필요 이상의 요구를 하게 되는 경우를 견뎌내지 못한다. 아빠도 나만큼은 아닐지라도 당신 주변에 부분부분 직선과 점선을 그려 놓고 사는 사람이었던게다.
아빠가 잠시 택시회사에 다니던 때를 제외하면, 아빠는 엄마와 과일장사를 했고, 가방공장을 했다. 운이 좋게 나는 이런 이유로, 엄마 아빠의 보육을 거의 동시에 받으며 자랐다. 심지어 택시 회사에서 교대 근무를 하던 때에도 새벽에 들어와 급히 짐을 싸고, 엄마와 나를 깨워 어디든 갔다. 강가에 텐트도 치고, 아빠가 낚시로 잡은 생선으로 엄마는 매운탕도 끓이고, 우리는 라면도 먹었다. 해루질을 좋아해 물이 빠진 갯벌에 손전등을 갖고 나가기도 했다. 어딘가 갈 때마다 차에선 잠만자던 나에게 아빠는 좋은 경치를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아빠는 나에게 자신이 아는 좋은 것들을 죄다 보여주려 애썼다.
우리 엄마는 조금, 아주 약간 나에게 집착하는 타입이었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오은영 선생이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에서 언급한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에 관한 짤이 돌곤 하는데, 단언컨대 나는 거의 모든 문장을 들으며 자랐다. '그거 하지마라', '이거 왜 이랬냐', '너는 누굴 닮아서 이러냐',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너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이래가지고 뭘 할 수 있겠냐' 등등.
나는 엄마에게 비교적 순종적이었던 아이고 --스무살 이전 한정.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가 어떻게 돌변했는지 들으시면 저는 아마 많은 분들께 돌을 맞을걸요...-- 엄마가 그런 부정적인 문장을 퍼붓는다고 해서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나보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튼 나는 엄마랑 노는 걸 좋아했고, 엄마가 나를 쫓아다니며 잔소리처럼 늘어놓은 말들은 늘 뭉쳐보면 망사무늬 하트모양이었으므로. 지금도 나는 내 딸에게 혹시 잘못된 말을 내뱉는다고 해도 --물론 못알아듣습니다. 지금 110일 되었어요.-- 사과는 하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말로 된 것들을 다 치우면 그 바탕에 밝은 하트 문양이 새겨진 바닥이 드러난다는 것을 가르쳐주면 된다고 여겨서다. --그렇다고 우리엄마가 저에게 아무말이나 막 내뱉은 사람도 아니고, 저도 아무 말이나 막 내 지르지는 않을거지만요.--
출산을 하고보니 엄마의 자식에 대한 기우와 걱정과 염려가 200프로 이해가 된다.
나를 품고 5개월차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 부모님은 사고를 크게 당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때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큰 차가 와서 정류장에 곤두박질 쳤다고 한다. 엄마도 아빠도 정류장 처마에 깔려 병원 신세를 졌단다. 엄마는 내가 큰 뒤에, 다행히 내게도 부모님께도 큰 상처는 입히지 않아 병실에서 고스톱도 치시고 아빠하고 오랜만의 휴가를 즐겼다고 말했지만, 아기를 가지고 나서 상상해보았다. 뱃속에 작은 생명을 품고 당하는 차사고. 아마도 엄마는 검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고스톱이고 나발이고 생각도 못했을게다. 나라면 어땠을까. 혹여라도 아기가 잘 못 되면 내 인생을 버릴 각오를 했을테다. 엄마에게 나는 그렇게 지켜낸 아이니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것을 엄마는 눈 뜨고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 같다.
이렇게 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고 믿어왔으므로, 나는 부성의 결여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자녀의 입장입니다. 엄마는 당시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딸은, 싫으나 좋으나 아버지와 닮은 남자를 찾아 나서는 법이라고 했던가?
처음 내 남편과 부모님이 영상통화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엄마가 따로 문자를 보내왔다. --저희는 호주에 있고, 부모님은 한국에 계셔서 상견례 전에 각자 집에 전화로 인사를 먼저 드렸었습니다.-- 평생을 비쩍 마른 아빠를 보고도 어디서 그렇게 마른 남자를 찾아왔냐는 거였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은 뱃살 자랑이 한창인, 오동통해진 우리아빠는 60이 넘을때까지 평생 60킬로그램을 넘어본 적이 없는 본 투 비 마른남자다. 이것저것 안해본 일이 없어 잔근육이 많은 몸이지만, 예전의 아빠는 '아이고 배불러'하며 난닝구를 들어올려도 갈비뼈가 몇개인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아빠보다 키가 더 큰 남편은 마흔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65킬로그램을 넘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마른 몸만 닮은 것은 아니다.
출산 전 나는 걱정이 많았다. 비위가 약한 남편이 과연 아기 탯줄을 자를 수 있을까? 아기 똥기저귀는 치울 수 있을까? 목욕은 시킬 수 있을까? 기우였다.
나는 아기를 품고 있던 9개월 동안 내 몸속에서 나쁜 것들은 걸러내고 좋은 것만 아기에게 전달해주었던 태반을 꼭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건 유기물이라 보관은 어려울 것 같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는 남자가 아내의 출산 장면을 보고 성적 매력을 잃어버렸다던가, 오바이트를 했다던가, 애기 탯줄을 자르는게 곱창 자르는 느낌이었다던가 아무튼 남편들이 철없다는 듯한 이야기만이 잔뜩있어서 '태반이 보고싶다'는 말도 어렵게 꺼냈다. 그러나 나는 어떤면에서는 조금 극성인 페미니스트였으므로 그래도 출산 때 남편이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지만 아기를 낳는 순간이 다가오자 비위가 좋지 않은 남편에게 밖에서 기다려도 좋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진통제와 수액때문에 극한의 추위를 느껴 오들오들 떨었고, 그런 나를 남편은 떠날 수 없었노라고 했다. 배를 가르며 약간의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지만, 나보다 그가 더 태연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연신 괜찮을거라고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줬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아기의 첫울음. 내 아기가 첫 처치를 받는 동안 우리 부부는 얼굴을 맞대고 울었다. 그 순간에 너무 추웠던 수술실은 한 가족의 사랑으로 후끈해졌다. 남편과의 첫키스, 처음 사랑을 나누던 순간처럼, 나는 이번엔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으로 충만해있었다.
그 후, 남편은 내 걱정을 비웃듯 하트 모양의 비교적 크고 통통한 태반을 사진으로 남겨두었고, 늠름하게 탯줄도 직접 잘랐다. 수술하는 장면은 배 위쪽으로 가림막이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우리 둘 다 보지 못했고, 나머지 걱정들은 할 필요조차 없었노라고 나중에 남편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그 순간을, 잊혀지지도 무언가로 절대 대체되지도 않는 것으로 손에 꼽으며 눈을 붉히곤 한다.
이렇게 다정한 남편도 매번 내 성에 차지는 않는 모양이다.--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욕심쟁입니다. 욕쟁이이기도 할까요?--
우리는 아기가 태어난 지 112일이 넘어가고 있는 지금도 종종 싸운다. 아니 싸운다기보다는 대체로 내가 몹시 뾰로통해진다. 나는 가끔 산후우울감인가 하는 감정에 휩싸여 있고, 남편은 두 달 전쯤 일로 복귀한 뒤 얼마전부터는 매우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이렇다보니 집안일은 온통 내 몫이고, 나는 거의 매일 24시간 말이 통하지 않는 생명체와 붙어 있다. 그만큼 나도, 그리고 나 만큼이나 그도 우리는 너무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다. 내가 가끔 아기가 토를 많이 한다는데 왜 그런가--정상입니다.--, 아기의 똥 색깔이 조금 초록빛인데 괜찮은건가--담즙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증상이 없다면 역시 정상입니다.--, 애가 열이 좀 있다--신생아의 체온은 37도 정도로 어른보다 더 높습니다. 역시 정상입니다.-- 등등 과민한 반응을 늘어놓으면 남편은 항상 '그럴 수 있지'하는 반응이다. 그러면 남편의 부성은 역시 내가 가진 모성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건가 하는 실망감이 든다.
이건 어떤면에서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이치다.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건 새생명 뿐만이 아니다. 출산을 겪은 산모는 아기만큼 돌봄이 필요한 존재다. 남편은 아기가 태어난 뒤 어쩐지 뒷전이 되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되려 자신이 갖고 있는 관심과 사랑 포인트를 아기에게 전부 주는 대신 아내에게 나눠줘야 한다. 아기를 돌봄에 지나친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아내를 다독이고 차분하게 해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둘 다 발을 동동 구르며 매 순간 일희일비하고 불안해한다면 대체 집안 꼴은 어떻게 되겠는가?
부성애(父性愛-아비 부)는 부성애(夫性愛-남편 부)와 자리를 나눠 공존하도록 되어 있다. 아기와 아내를 동시에 보살펴야 하는 남편이란 존재가 모성만큼의 부성만을 가졌다간 그 균형이 흐트러져 버린다. 그렇기에 자연은 여자가 아기를 아홉달 품고, 출산의 고통을 오롯이 가지고, 모유를 생산하게 만들고, 남편은 그것을 면하는 대신 아내와 아기를 돌볼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아 놀라운 이치가 아닐 수 없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멀리떨어져 외로울 때, 어쩐지 육아는 독박을 쓴 것만 같을 때, 빨래는 해야하고 아기는 울며 나를 찾을 때, 가루가 돼서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마다 나는 남편이 내게 밤 별 쏟아지는 사진과 함께 보낸 문자를 들여다본다. 나를 위한 짧은 시였다.
[아기 울음소리 그치지 않고 별밤은 속절없이 빛난다./ 너는 그 고생을 이 별빛 속에 흩뜨리고 아이를 낳고, 지금도 선잠으로 빈 몸으로 밤을 지내는구나/ 아직 서툴고 직선밖에는 모르는 나지만, 오늘 밤을 잊지 않고 너를 사랑할거야.]
하도 마음고생을 시켜서 남편이 그간 더 서운해져 내가 조금은 미움을 샀을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그가 보내온 따스한 마음을 내 속에 가득 채우고, 그 마음을 전부 아기를 다독이는데 써버리겠지만, 괜찮다. 그의 마음은 내일이면 다시 차오르는 커다란 태양 같은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