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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Jun 19. 2022

아포칼립스에 대해 생각하다

노산, 초산. 임신과 출산이야기



 아기는 지난 화요일 백일을 맞았습니다. 퀸즐랜드의 바닷가 마을에는 백일상을 대여해주는 곳도 없고 해서 가족 셋이 간단하게 축하하고 셀프 사진을 찍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 애와 3개월 차이 나는 지인의 아기가 '뉴본'사진을 찍었더라구요. 태어나고 열흘 이내에 작은 아기를 더 작게 수건으로 돌돌 말고, 머리에 꽃이나 리본을 달아 바구니에 넣어 찍는 형식입니다. 2등신이 된 아기는 남의 애인데도 귀엽더라고요. 우리 애도 해줄 걸 하는 마음에 시샘이 났습니다. 그래서 뉴본은 훨씬 지났지만 100일이 넘은 우리 아기도 비슷한 컨셉으로 한번 찍어보긴 했지요. 물론 힘이 장사인 내 딸은 수건 속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자식이 제일 예쁜 고슴도치는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봅니다. 장장 한시간이 넘는 사진 촬영에 저도 남편도, 그 누구보다도 아기가 제일 힘들었을거예요. 옷을 여러 번 갈아입혔더니 마지막 착장에서는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자다 깬 아기는 이따금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남편이 옷 갈아입는 꿈이라도 꾼 게 아니냐고 물어 엄청 웃었어요.

 언젠간 공개할 날이 오겠지요? 150장 정도 찍은 것 같던데 이걸 고르려니 저게 예쁘고, 저걸 고르려니 이게 아쉽습니다. 다 이쁜걸 어떻게 하겠어요?









 아이를 출산하기 전 나는 B급 호러영화 마니아였다. 대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의 호러무비 사랑은 시간이 지나며 좀비영화로 굳혀졌다. 유혈이 낭자하고 온 관절이 꺾인 채 도로를 활보하는 죽지 않지만 살아있지도 않은 것들이 즐비한 스크린 밖에서 나는 순댓국도 먹고, 선짓국도 먹었다. 그건 가짜니까. 



 대학교 3학년 때인가 전공수업의 일환으로 만나게 된 한 강사의 회사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다. 취업이 된 것은 아니었고, 프로젝트 한두개 정도를 맡는 직책이었다. 그때 맡은 일 중 하나는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이하 피판_PIFAN)의 발전과 번영,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도모하기 위해 관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나 설문을 하는 일이었는데, 부천과는 정 반대의 경기도민이었던 관계로 하룻밤을 머물며 업무를 진행했다. 밤에 마땅히 할 것도 없어 심야상영을 끊었다. 그때 본 게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리즈 다섯 편이었다. 

 

 '마스터즈 오브 호러'는 호러영화 제작자로 알려진 '믹 게리스'가 제작한 회심의 시리즈로, 각 시즌 당 13편씩 스물여섯 편에 이르는 일종의 호러물 선물세트다. 영화 '링'으로 유명한 '미이케 다케시'를 비롯해 '존 카펜터', '조 단테', '스튜어트 고든', '토비 후퍼' 등 감독 이름은 알지 못해도 영화는 널리 알려진 장르 영화 거장들을 모아 1시간짜리 단편을 각각 제작하여 케이블 채널에 송출했던 TV시리즈다.--시즌2가 1에 비해 비교적 아이디어나 수위가 약하고 인기가 덜해져 뒤로는 시리즈 제작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시즌3에는 박찬욱 감독도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해서 한 때 기대했었는데 몹시 아쉬웠더랬죠.-- 피판에서는 2006년 시즌1을 방영, 여러모로 극찬을 받았던 터라 아마도 2007년에 시즌2가 초대되었던 듯싶다. 내가 본 건 새벽까지 이어지는, 이 시리즈에 속한 다섯 편의 호러 단편이었다. 함께 간 친구도 나도 새로운 취향을 발견해 흥분한 채 다음날을 맞았다. 아침 식사로 뼈다귀해장국을 삼키며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지 싶지만...--자세한 영화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저 시리즈를 꼭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유혈이 낭자하긴 하지만 꽤 매력 있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아무튼 이때부터 나는 유명하다는 온갖 호러무비들을 찾아보고 다녔다. 피판에서 본 다섯 개의 에피소드뿐 아니라 나머지 스물하나 작품들도 물론 모두 찾아보았고, 다른 유명하다는 영화들도 섭렵했다. 공포 영화에는 어떤 장르들이 있는지, 어떤 감독의 작품이 취향에 맞는지 다양하게 보고 공부도 했다. 내 생에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열심이었던 때가 있었나 싶다. 어느 날은 인터넷 티비에 SAW 시리즈가 한시적으로 무료인 것을 보고는 --제 기억에 아마도 쏘우 7 개봉 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종일 재생했다가 엄마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을 정도. 지금도 집에 가면 두꺼운 씨디 보관함에 DVD로 공포영화만 잔뜩 넣어 놓은 나만의 컬렉션이 있고, 예전엔 시간 날 때마다 봤을 정도로, 나는 그 영화들에 푹 빠져있었다. 


 한동안 쏘우 시리즈 덕에 큐브니 뭐니 하는 고어물에 빠져있었다. 정말 정신이라도 나간 건지 틈만 나면 본 걸 또 보곤 했었는데, 십몇 년 전인가 워킹데드를 본 뒤에는 좀비물에 푹 빠져버렸다. 그 뒤로 특유의 매력이 있는 한국 좀비물도 쏟아져 나와서 좀비들의 괴성 외에는 알아들을 길이 없던 나도 자막 없이 즐길 수 있는 것들도 생겨났다. --외국 생활이 길어졌고, 공포물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쉬운 영어이기에 어지간하면 지금은 외국영화도 자막 없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뿌듯.-- 임신 기간에 보지 못하고 아껴뒀던 것들도 출산 후에 이어폰을 끼고 전편을 섭렵할 정도로, 나는 어쩌면 엄마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취미일지 모르지만 이런 장르 영화들이 즐겁고 좋다. 

 영화를 보고나면 스릴있고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다. 만일 세상에 좀비가 나타난다면 내가 아빠 트럭을 끌고 친구를 데리러 간 뒤, 친구 집 근처의 모든 좀비들을 싹쓸이하고 조수석에 태워 유유히 좀비 떼를 빠져나가는 상상. 극한의 상황에선 무슨 짐을 먼저 싸야할까? 생존에 필요한 물과 보관기간이 긴 저장음식, 무기로 쓸 수 있는 물건들을 챙기자. 그리고 차는 가시공간을 제외하고는 밖이 보이지 않게 신문지나 종이로 가린다. 유리는 깨지지 않게 청테이프로 꼼꼼히 도배해준다. 아 역시 나는 생존할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좀비나 고어와는 거리가 아주 먼 천사가 나타났다. 

 아기가 태어나고 이러한 장르 영화들이 조금 역해졌다. 피 튀기는 잔인한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불안한 상상이 공존하는 걸 느껴야 한다. 어떤 장면에 이입하든 재미있는 상상일 뿐이었던 것들인데 언젠가부터 어떤 장면에든 내가 있는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저 오락에 불과하던 것들이 불편해졌다. 

 좀비 영화라면 어떨까. 우선 차에 실을 짐이 두세배로 늘었다. 어른처럼 캔 음식이나 먹으며 연명하기 어려운 아기를 위해 분유도 싸야하고, 물은 더 많아야 한다. 물을 끓일 수 있게 포트도 가져가야할까? 전원은 어디서 구한다? 차에 연결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정기적으로 주유를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남편과 함께가 아니라면 할 수 있을까? 나는 면허도 없는데. 아 차는 반드시 차고에 주차해야만 한다. 밖에서 온갖 짐을 싣다가 좀비와 마주치면? 그러다 나나 남편이 다치면 어쩌지? 도망치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자. 집 창문을 막고 깨지지 않게하고, 아기가 울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기 방에는 소음이 차단되도록 벽과 문에 이불을 덧대야겠다. 그리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러다 구조대가 오지 않으면?

 나는 공포에 몸서리쳤다. 더 이상 재미있는 상상이 아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질까 진지한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강도나 도둑으로부터는 최소한의 방어와 대책은 세우려고 하는 편이다. 며칠 전 남편이 개인적인 약속으로 밤에 집을 비웠다. 고작 두시간 정도였다. 나는 혹시 강도가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미 굳게 잠긴 현관문을 열었다 닫았다 잘 잠겨있는지 여러번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리고 아기가 침대에서 숨을 잘 쉬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같은 방에서조차 핸드폰에 베이비 카메라를 켜 두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출산과 죄책감은 세트인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죄책감을 뒤따르는 것이 극한의 공포심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누구에게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과 슬픔의 크기를 감히 재단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가장 겁이 나는 일은 내 가족에게 생길지도 모르는 어떤 미지의 사고들이다. 알고있다. 좀비는 가상의 존재이다. 실제로 세상이 아포칼립스에 빠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상상이고 가짜이니.

 나는 오늘도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조금 두려운 마음을 접어 하늘에 날리려 노력한다. 내 아이가 자랄 세상은 어쩌면 좀비는 없지만 그만큼의 시련도 아픔도 이겨나가야만 하는 곳일거다. 나는 내 아기에게 두려움이 전달되지 않도록 오늘도 차분한 마음을 담아 속삭인다. 괜찮아 우리 같이 이겨나가자 하고. 

 비록 아직 우는 아기를 붙잡고는 더 많이 울어버리는 겁쟁이 초보 엄마지만, 아기도 나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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