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7-9] 정기룡과 이동현 전투

수필 임진왜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섬멸한 일본군은 거침없이 북상한다. 좌군은 전라도로 북상하고, 우군은 경상도로 북상한다. 일본 우군의 제8번대 모리 테루모노의 3만 군에서 떨어져 나온 나베시마 휘하의 군사 1만 2천은 낙동강을 건넜고, 의령과 삼가를 거쳐 성주를 향해 기세도 등등하게 북상했다.      


이런 왜군의 기세를 꺾는 전투가 있었다. 고령의 이동현 전투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은 정기룡이다. 그를 나는 용장(勇壯)이라 부른다


도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 명나라 장군 모국기, 의병장 곽재우, 정기룡 등이 모인 성주 군사회의에서 정기룡은 조선군 선봉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상주, 선산, 성주, 고령, 합천, 초계, 의령 등 9개 군 28관의 진병 곧 지방 병력을 성주에 집결시킨 다음, 남쪽으로 출격하고자 했다. 


이때 성주 목사 이수일이 정기룡의 출격을 막았다. 그는 훗날 북벌계획을 지휘한 훈련대장 이완의 아버지다.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 고을에 입성하여 성주 사람들이 구사일생이라 기뻐했는데 이제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가면 성주 사람들은 어쩌란 말이오?”

“소장은 도체찰사와 도원수의 명을 받들어 의령, 합천의 적을 치러 내려가야 합니다.”

“아니 될 말씀이오. 장군이 성주 고을에 입성한 이상, 성주 목사인 본관의 지휘를 받아야 하오. 예로부터 ‘장수가 전장에 나가면 천자의 명도 무시할 수 있다.’라고 하는 말이 있으니, 장군이 비록 도체찰사의 명을 받았다고 하나, 본관은 성문을 열어드릴 수 없소이다.”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도체찰사 이원익이 달려왔다.

“성주 목사 이수일은 들어라. 그대가 성주 목사로서 성주를 위하는 것은 좋으나, 성주 고을 말고도 즐비한 다른 고을 또한 나라의 땅이니라. 나라가 모두 적에게 짓밟힌 뒤에 어찌 성주만 홀로 무사할 수 있겠느냐? 또 전장에서 장수가 천자의 명을 무시할 수 있다는 말도 함부로 쓰는 말이 아니다. 즉시 성문을 열어 선봉장이 출격할 수 있게 하라.”

결국, 이수일은 성문을 열었고, 정기룡은 출격했다.     


1597년 9월 25일(음 8월 15일) 새벽, 정기룡은 척후 장 이희춘과 황치원에게 기병 400여 명을 주어 정찰하게 했다. 그들은 안갯속에서 정찰 나온 일본군과 만났다. 그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안개가 사라질 무렵, 이희춘과 황치원의 기병대는 일본군 정찰대 100여 명을 섬멸하고 그들의 수급과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귀환했다. 용장 정기룡 수하에는 이희춘과 황치원이란 용사도 있었다.


다음날인 8월 16일,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정기룡은 고령의 용담천을 사이에 두고 나베시마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선군의 한쪽이 무너지더니 도주한다. 경상도의 조선군을 전멸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일본군이 용담천을 건너 추격했다. 조선군은 이동현 방향으로 도주했다. 그 뒤를 나베시마의 일본군이 추격한다.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그것은 정기룡의 작전이었다. 


나베시마의 일본군이 이동현으로 들어왔을 때 조선군이 도망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로 돌아서서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그와 동시에 3방향에서 조선군이 튀어나와 일본군을 포위했다.


당황한 일본군은 조총을 겨누었으나 때는 늦었다. 조선군이 던진 쇠 질려 통이 일본 조총 수의 대열에 떨어졌고 그것이 꽝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솟구쳤다. 그러는 가운데 전투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4배나 되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본군은 접근전 수행 능력이 뛰어났지만, 그날의 전투는 전혀 달랐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조경과 박진의 지휘 아래 조련을 받은 경상도 조선군은 접근전에서도 일본군을 압도했다. 


일본군의 창검 숲도, 무수하게 쏘아대는 조총도 두려워하지 않은 조선군, 그 자체로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총을 들고 있었으면서도 쏘지 못했고, 창검도 휘두르지 못한 채 살길을 찾아 허둥댔다. 이러는 일본군 머리 위로 조선군이 쏘아대는 석전 수차의 탄환이 쏟아졌다.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일본군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동현 후방에 포진하고 있던 조선군 궁수들의 표적이 되었다. 나베시마도 포위망을 돌파했으나 궁수들의 화살을 맞고 낙마하여 생포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 우군은 경상도에서 썰물처럼 퇴각했다. 합천, 초계, 의령, 성주 등지에서 그들의 그림자도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통쾌한 승리였다.     


혹자는 고령의 이동현 전투에서 세운 정기룡의 공적에 대하여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좋다. 승리에 목마른 선조에게는 얼음냉수다. 


고령의 이동현에서 승리의 합창곡이 울려 퍼진다. 평소, 자기의 담당 부서에 충실한 성주 목사 이수일, 임진왜란과 같은 비상시국에서 뛰어난 지략으로 승리를 일구어낸 용장 정기룡, 용사 이희춘과 황치원, 도체찰사 이원익 등이 마음을 합하여 부르는 개선 행진곡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0-8] 만인의총과 충렬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