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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8-1] 1패 3승의 전투

수필 임진왜란

1597년 추석 무렵에 4번의 전투가 있었다. 육지에서 두 번, 바다에서 두 번이다. 그중 황석산성 전투에서 패하고, 나머지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그래서 1패 3승이다.      


황석산성 전투(黃石山城 戰鬪)는 1597년 (음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 동안에 진행된 전투로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음 8월 16일),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황석산성을 공략했다. 함양의 황석산성은 호남과 영남의 길목에 있는 요충지로, 왜군이 반드시 차지하려는 곳이다. 그것을 간파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현재의 함양인 안음 현감 곽준(郭䞭)에게 그곳을 지키게 명했다. 


곽준은 수성(守城) 계책을 세우고, 성을 보수했다. 성안에 있었던 함양 군수 조종도(趙宗道),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 등도 합의했고, 백성들과도 ‘성을 지키자.’라고 굳게 결의했다. 


왜적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가토는 남쪽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서쪽에서, 구로다는 동쪽에서 공격했다. 


조선의 장수들은 활을 쏘고, 백성들은 돌을 던지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곽준은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조종도 역시 전사했다. 김해 부사 백사림은 사태의 불리함을 알고 자기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도 도망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장차 나라와 고장의 발전에 공헌할 유능한 인재로 성장해야 한다.’라고 훈화했었다. 그 목표는 안의 현감 곽준이나 함양군수 조종도와 같은 지도자가 되라는 것이요, 적어도 성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황석산성의 백성과 같은 인물이 되자는 것이었다.      


육지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는 직산 전투, 양호가 지휘하는 명군이 충청남도 천안시의 직산에서 북진 중이던 일본군과 맞붙어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 결과, 일본군을 순천, 울산 등지로 후퇴하게 하였고, 북진을 좌절시켰다.


10월 16일(9월 7일), 일본군은 조총과 활 등을 앞세워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기병 중심으로 구성된 명의 돌격전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본군의 조총은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명의 기병에 대하여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병기를 버리고 퇴각하기에 바빴다. 


양호의 기병이 신립의 기병과 무엇이 달랐을까? 기병은 기동성이 생명이다. 신립의 전투 시기는 6월, 논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런데 양호의 전투 시기는 10월, 논바닥이 말라 있었다. 전투 시기에 따라 건투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1598년 5월 5일(음 4월 1일), 이순신이 감옥에서 나왔다.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임지로 돌아간다. 8월 28일(음 16일)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삼도 수군통제사 원균도 죽었다. 이제 그 임무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의 건의로 이순신에게 맡겼다. 

명을 받은 이순신,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선조에 대한 원망도 있을 듯하고 원균에 대하여 비난도 했을 법하나, 내색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임무에만 집중했다. 


그는 판옥선을 수습했다. 모두 13척이다. 그중 12척은 칠천량 해전 당시 배설이 끌고 나온 것이다. 배설에게 상을 주어야 할 대목이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전투함이다. 갑판 위로 올린 구조물을 ‘판옥’이라고 한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배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어서, 노 젓기는 노군(櫓軍)들의 공간과 전투에 임하는 전사(戰士)들의 공간 등이 분리되어 서로 방해받지 않는다. 저판(底板) 길이는 50~55척이나 되고, 탑승 인원도 130명이나 될 정도로 크지만 1개의 노에 노군 5명을 배치하여 기동성을 높였다.      


복귀한 이순신이 첫 번째로 출전한 해전은 어란포 해전(於蘭浦海戰)이다. 

10월 7일(8월 27일),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의 어란포(於蘭浦) 앞바다에 왜선 8척이 출현했다. 이순신은 이 배를 먼바다로 유인해서 침몰시켰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적에게 알렸다. 


두 번째로 출전한 해전은 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이다. 10월 16일(9월 7일),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13척을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앞바다에서 격침했다. 이들 해전을 통해 이순신은 ‘조선 수군에게 판옥선은 13척에 불과하다.’라는 조선 수군의 동향을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에게 은근히 알려주었다. 왜 수군을 명량해협으로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하니 그의 전략을 따를 자는 없다. 이순신은 적을 유인하여 어쩔 수 없이 나오게 한다. 그리고 일단 나오기만 하면 저들을 격멸했다. 그는 명장 중 명장이다.      


이상 네 번의 전투 중 육지의 적산 전투, 바다의 어란포 해전과 벽파진 해전 등은 조선이 승리했고, 육지의 황석산성 전투는 패배했다. 결과는 조선의 3승 1패이다. 그런데 굳이 1패 3승이라 했다. 왜 그랬을까? 전투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허ᅟ간다. 한 번이라도 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국가 지도자는 아예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그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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