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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8-6]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의 육로군

수필 임진왜란

1598년 (음 8월 18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저들을 추격해서 섬멸해야 한다.      


명군의 제1인자 경략(經略) 형개(邢驚)도 일본을 총공격할 작전을 수립했다. 조명연합군은 육상군을 셋으로 편성했다. 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군을 공격하는 동로군,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군을 공격하는 중로군,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하는 서로군 등이다. 그리고 진린의 명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은 수로군도 편성했다. 이들이 동시에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계획했다.


이 작전은 정유재란을 끝내려는 총공격작전이다. 성공하면 일본군을 섬멸할 수 있다. 그런데 전투에 임하는 명군의 지휘관들이 어설프기만 했다. 작전 수행능력이 엉성했다.      


10월 21일(9월 22일), 제2차 울산성 전투(第二次蔚山城戰鬪)는 동로군이 경상도 울산왜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이다. 명의 제독 마귀의 지휘 아래 공격을 시도했으나 별장 선거이가 전사하고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이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일본인이 있다. 그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제1군을 섬멸시킨 김충선으로 ‘가선대부’를 하사받았다. 1592년에 귀화했다.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감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와 조선에 항복했는데, 이들을 ‘항왜’라고 한다. 그들은 뛰어난 무예 실력과 화포 기술로 조선군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었다. 그러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기질이 드센 이들을 부담스럽게 여겨 중국으로 보내거나 변방 수비에 동원하는 등 소모적인 자원으로 활용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김충선은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임진왜란은 물론 163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 163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삼난공신(三亂功臣)’의 자랑스러운 조선인 되었다.     


10월 27일(9월 28일), 사천성 전투(泗川城 戰鬪)는 중로군이 경상도 사천 선진리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이다. 지휘관은 명나라 장수 동일원으로 결과는 대패였다.


당시 사천 일대의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주축으로 한 5개 부대가 결합해 있었다. 전투에 임하는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주도면밀했다. 사천에서 진주에 이르는 요해처(要害處) 곧 지세가 조선군에게 불리하고 자기편에는 유리한 지점에 진영을 설치하는 한편, 진주성에 미하라 시게다네(三原重鍾)를, 망진왜성에는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를, 영춘왜성과 사천구성에는 가와카미 히사토모(川上久智)와 가와카미 다다자네(川上忠実) 등을 배치했다. 그리고 진주 남강을 최전 방어선으로, 망진왜성·영춘왜성·사천구성의 3성을 사천 선진리 왜성의 전진 방어 진지로 삼았다. 


시마즈군의 병력 7천 명이 조·명 연합군 40,000여 명의 대군을 맞아 싸웠다.

(음 9월 20일), 중로군은 진주의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점령하고,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 왜성으로 육박해 나아갔다.

(음 9월 28일) 밤,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천고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병력 손실을 입고 사천 선진리 왜성으로 철수했다. 조·명 연합군은 사천, 고성까지 점령했다.

(음 10월 1일) 선진리 왜성을 또 공격했다. 전투 도중 요시히로는 식량창고에 불을 질렀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해서는 다량의 조총을 발사하고, 지뢰를 묻는 방법으로 방어했다. 포탄 대신에 쇳조각이나 철정 등을 장전한 대포도 사용하고, 복병을 출동시키는 등 완강한 저항에 부닥쳤다. 


중로군은 8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철수하고 말았다.      

10월 19일(9월 20일)부터 11월 5일(10월 7일)까지의 순천왜교성 전투는 명의 제독 유정이 지휘한 서로군 담당이다. 


그는 순천 왜교성의 적을 치기로 하고, 한성을 출발했다.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포함한 연합군 3만 6,000명이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10월 3일), 공격할 날이 되었다. 그런데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명의 제독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왜장 유키나가는 명의 장수를 매수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싸우지 않고 조명연합군을 물러가게 했다. 참으로 얄밉지만 그는 일본의 3장수 중 가장 뛰어난 전략가임에 분명하다.     


정유재란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하려고 야심차게 계획했던 명군의 제1인자 형개의 사로병진작전은 용두사미(龍頭蛇尾)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일본군을 섬멸하리라 기대했던 선조에게 실망만 안겨준 작전이다.

이 작전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작전의 책임자가 명나라의 대장인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전투에서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었고, 일본을 섬멸할 치밀한 계획도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도래하게 만든 자는 누구인가? 결론적으로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사건건 남의 탓만 했다. 그 못된 버릇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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