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9부
‘선거이는 이순신과 동갑내기 친구’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선거이는 1545년 7월 25일(8월 31일)생이고,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4월 28일)이다. 1545년생으로 동갑내기는 맞다. 그런데 선거이는 전라도 보성에서 태어났고, 이순신은 한성부 남부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함께 지낸 바 없다.
선거이는 1569년(선조 2년, 24세) 겸사복(兼司僕)으로 임명된다. 대통령 경호원에 해당되는 벼슬이다. 1579년(선조 12년, 32세)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6년 함북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 정3품)으로 임명된다. 군단장의 보좌관과 비슷한 직책이다. 여기서 조산 만호(造山萬戶 종4품) 이순신(李舜臣)을 만난다. 두 사람의 대화를 소개한다. 이일(李鎰)이 녹둔도 전투의 승리자 이순신을 옥에 가두었을 때이다.
선거이 “모함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가는데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라.”
이순신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술은 마셔서 뭐 하겠나?”
선거이는 병조판서 정언신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의 무고를 주장했다. 선거이는 상사인 이일 앞에서 아부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보다 8년이나 늦게 벼슬에 올랐고, 계급도 2단계나 낮은 이순신과 의기투합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 것일까?
1590년 선거이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정3품, 전라도 해남 우측 해군 군단장)로 임명되었다. 당시 정읍 현감(종6품)이었던 이순신이 전라우수영에 찾아왔다. 선거이는 이순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가장 귀한 손님으로 접대했다.
1592년 3월 17일 선거이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임명된다. 군인으로 최고위 직책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발발로 그것을 전달받지 못했으며, 그 임명장은 현재 ‘독립기념관’에서 보관 전시되고 있다.
1592년 선거이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한산 대첩(음력 7월 8일)과 장문포 해전(음력 10월 1일)에 참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왜군들은 그를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그해 11월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종2품, 전라도 군단장) 자격으로 권율이 지휘하는 오산 독성산성 전투(음력 12월 11일)에 참전하여 승리했으나 적의 총탄에 맞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나라에서 선거이를 불렀다. 선거이는 총탄에 맞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핑계 대지 않고 나갔다. 그리고 제2차 울산성 전투(음력 9월 22일)에 참전하여 적 7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도 올렸다. 안타깝게도 그는 전사했다. 시신도 찾지 못한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
여기서 조선의 인사 정책에 관해 시비를 건다. 전투는 기본적으로 무관이 지휘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행주대첩의 총사령관 도원수는 10년 차 문관인 권율이었고, 부원수는 23년 차 무관인 선거이였다. 또 두 사람이 지휘한 병력을 비교해 본다. 권율이 지휘한 병력은 전라도 감영 소속 병사 8백 명이었고, 반면 선거이가 지휘한 병력은 1만 2천 명이다. 조선의 인사 정책이 불공정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불공정한 인사 정책은 필연적으로 불공정한 사례를 발생시킨다. 하나만 소개한다.
1593년 6월 ‘진주성을 사수하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것은 탁상행정의 결과였다.
“조선군은 병력이 적고, 왜군은 병력이 많으니 조선의 모든 병력이 진주성 내로 진입했다가 포위 고립된다면, 조선군 전체가 섬멸당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지금은 병력을 보존하여 북진을 저지하고 호남을 방위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거이는 반대 의견을 냈다. 도원수 권율도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그것이 1629년 이항복의 백사별집 제3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선거이에게 ‘명령 불복종’의 징계가 내려졌고, 선무공신 1등(이순신, 권율, 원균)에도 오르지 못했다. 당시 논공행상을 논하는 인물 중 영의정 권철은 권율의 아버지이고, 병조판서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였다.
임진왜란 중에 이루어진 불공정한 인사 정책은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 결과에 관한 판단도 왜곡되었다. 그것들이 쌓여 나라를 병들게 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선거이를 동갑내기 친구로 알뜰하게 생각하는 기록이 있다.
“종일 다락에 앉아 있는데. ‘충청 수사’가 말이 분명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가서 보니 중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습기가 많은 곳에서 발생하는, 뼈마디가 저리고 아픈 ‘풍습병’으로 많이 상했다. 무척 염려된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20일)
(贈別宣水使居怡 증 별 선수사 거이)
수사 선거이와 작별하며 (난중일기 1595년 9월 14일)
(北去同勤苦 북거동근고 南來共死生 남래공사생)
북쪽에 가서도 함께 동고동락했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했지.
(一杯今夜月 일배금야월 明日別離情 명일별리정)
오늘 밤 달 아래 술 한잔 나누고, 내일은 이별의 정을 나누는구나.
비장군 선거이는 그 삶이 이순신의 삶과 많이 닮았다. 1545년에 동갑내기로 출생한 것이 닮았다. 1598년 향년 53세로 전사한 점이 닮았다. 전사 시황도 닮았다. 선거이는 육군 최고 지휘관으로 육상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순신은 해군 최고 지휘관으로 해상의 마지막 해전에서 전사했다. 두 분은 목숨 바쳐 충성했지만, 선조로부터 환호받기는커녕 극심한 차별에 시달린 비운의 영웅이란 점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