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사로병진작전 중 육로군의 작전

수필 임진왜란 제8부

by 수필가 고병균

명량해전이 끝났을 때 왜군은 공세종말점에 빠져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거부당하여 엉거주춤한 상태로 남해안의 각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의 주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그날이 1598년 8월 18일(9월 18일)이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작전을 계획했다.


사로병진적전은 왜군을 섬멸할 목적으로 명의 제독 양호가 입안하고 경략 형개가 이어받은 작전이다.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 등 3개의 육로군과 수로군으로 편성했다.

동로군은 가토 기요마사의 1만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울산왜성을 공격한다. 지휘관은 명의 제독 마귀와 조선의 별장 선거이, 김응서이며, 병력은 명군 2만 4천 명, 조선군 1만 6천 명 등 4만 명으로 편성되었다.

중로군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1만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천왜성을 공격한다. 지휘관은 명의 제독 동일원과 조선의 경상우병사 정기룡이며, 병력은 명군 3만 7천 명, 조선군 3천 명 등 4만 명으로 편성되었다.

서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5천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순천 왜교성을 공격한다. 지휘관은 명의 제독 유정과 조선의 도원수 권율이며, 병력은 명군 2만 5천 명, 조선군 1만 명 등 3만 5천 명으로 편성되었다.

수로군은 서로군과 합세하여 순천 왜교성을 공격한다. 지휘관은 명의 제독 진린과 조선의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이며, 병력은 명군 1만 명, 조선군 5천 명 등 1만 5천 명으로 편성되었다.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편성된 병력은 명군이 9만 6천 명이요, 조선군이 3만 4천 명으로 무려 13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 왜군 3만 5천 명을 상대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런데 육로군은 물론 수로군까지 총사령관이 명의 장수다.


사로병진적전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먼저 3개의 육로군을 살펴본다.

9월 19일(10월 18일), 중로군이 경상도 사천 선진리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를 사천성 전투(泗川城 戰鬪)하고 하는데, 정기룡의 활약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나 실패했다.

9월 20일, 중로군은 진주의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점령하고, 사천고성과 선진리왜성으로 육박해 나아갔다.

9월 28일 밤,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천고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병력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조명연합군은 사천고성까지 점령했다.

10월 1일, 정기룡이 선진리왜성을 또 공격했다. 왜장 요시히로는 연합군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고, 다량의 조총을 발사하고, 지뢰를 묻는 방법으로 방어했다. 포탄 대신에 쇳조각이나 철정 등을 장전한 대포도 사용하고, 복병을 출동시키는 등 완강하게 저항했다. 중로군은 8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철수했다. 그래도 왜군에게 상당히 많은 타격을 입혔다. 그 작전은 노량해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9월 20일(10월 19일), 서로군이 순천 왜교성을 공격해야 할 날이다.

9월 19일(10월 18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은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10월 3일, 아무리 기다려도 공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을 받고 매수된 명의 제독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왜장 유키나가는 명의 장수를 매수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의 이여송을 매수하여 피해 없이 철수한 바 있는 지휘관이다. 참으로 교활하고 얄밉지만, 그는 외교 능력이 뛰어난 전략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22일(10월 21일), 동로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했다. 육상에서 벌어진 전투인 제2차 울산성 전투(第二次蔚山城戰鬪)로 별장 선거이가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공을 크게 세운 일본인이 있다. 1592년에 귀화한 김충선이다. 그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제1군을 섬멸시킨 공로로 ‘가선대부’를 하사받았다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감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와 조선에 항복했는데, 이들을 ‘항왜’라고 한다. 그들은 뛰어난 무예 실력과 화포 기술로 조선군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기질이 드센 이들을 부담스럽게 여겨 중국으로 보내거나 변방 수비에 동원하는 등 소모적인 자원으로 활용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김충선은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임진왜란에서는 물론 163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에서, 163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워 ‘삼난공신(三亂功臣)’에 오른 자랑스러운 조선인이다.


이상 사로병진작전 중 육로군이 펼친 작전은 모두 패했다. 왜 그랬을까? 중로군의 사령관은 동일원, 서로군의 사령관은 유정, 동로군의 사령관은 마귀 등 모두 명나라 장수였다. 이게 패인이다. 이들에게는 조선군 3천5백 명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 2만 명을 함경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북관대첩의 지휘관 의병장 정문부처럼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필승의 신념이 없었다. 조선군 1천5백 명으로 왜군 5천 명의 공격을 막아낸 연안 전투의 지휘관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명의 지휘관들은 상대할 왜군은 총 3만 4천 명에 불과한데, 끌어모은 조명 연합군은 무려 13만 명이나 된다. 그러나 육로군은 모두 패배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조선은 조선 백성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필승의 신념이 있고 결단력도 발휘하는 조선인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게 바로 자주국방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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