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다. 고경명과 함께 유명한 의병장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부자로 소문난 곽재우에 대하여 알아 본다.
곽재우는 현풍 곽 씨로 1552년(명종7) 9월 16일,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도로명 주소로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2동길 33이다. 아버지는 곽월, 어머니는 진주 강 씨 그 사이에서 태어난 3남 1여 중 3남이다.
곽재우의 가문 현풍 곽 씨는 고려 때부터 현풍 지역에 뿌리내린 토호 집안이다. 고려 때 현풍이 밀양부에 속해 있었던 까닭에 밀양의 토호 밀양 박 씨 집안과 혼맥을 이루며 위세를 떨친 가문이다.
곽월의 고조부 곽안방(郭安邦)은 현풍 곽 씨 중시조이자 청백리(淸白吏)였다. 그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원종 공신이 되었다. 그는 중앙무대에서 이름을 날리지 아니하고 지방에서 뿌리를 내렸다. 이게 바로 곽재우 가문이 200년 이상 부자로 살아온 비결이다.
곽월의 증조부 곽승화(郭承華)는 선산 김 씨의 딸과 결혼했는데 선산 김 씨는 김종직의 가문이다. 곽승화 본인도 김종직의 제자이자 훗날 조광조의 스승이 되는 한훤당 김굉필과 절친해서 지역 유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자였다.
곽월의 조부 곽위(郭瑋)는 현감 벼슬을 지냈고 평산 신 씨 신승준의 딸과 혼인했는데 밀양 지역의 송계 신계성의 고모였다. 곽월의 아버지 곽지번(郭之藩)은 문과에 급제한다.
그의 외조부 강응두는 의령의 세간리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부호다. 김해 허 씨, 의령 남 씨, 의령 심 씨, 의령 옥 씨, 의령 여씨, 담양 전 씨, 고성 이 씨 등과 함께 의령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의주 목사, 황해 감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곽월(郭越)은 강 씨와 혼인한 이후 자기 고향 현풍현을 떠나 처가 동네인 세간리로 이주했다. 강 씨가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처가에서 데리고 사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듯하다. 곽월은 당연히 장인의 가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곽재우의 나이 3살 때 어머니 강 씨가 세상을 떠났다. 곽월은 새 작가를 들었는데 둘째 부인 허 씨의 친정도 부자였다. 아버지는 허경맥이고, 조선전기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요,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첫 번째 부인 허 씨와 4촌으로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가였다.
1585년, 34세인 곽재우가 대과에 2등으로 급제했다. 그러나 선조를 비판한 답안이 문제되어 낙향하였다. 35세 때, 아버지 곽월이 사망했다.
아버지가 부자라고 해서 아들까지 부자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부자라고 말한다. 그는 벼슬도 못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6년 동안 의령에서 살았다. 이런 상황인데 곽재우는 농업 경영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말한다. 초유사 김성일과 경상 감사 김수는 장계를 올릴 때 ‘곽재우의 재산이 많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곽재우에게는 부를 축적하는 재주가 남달랐던 게 분명하다.
이랬던 그가 1617년 4월 10일, 6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긴 것이라고는 단 벌 옷에 거문고 그리고 낚싯배 한 척뿐이었다. 그 많은 재산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1592년 4월,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켰다. 평소 알고 지내던 심대승, 권란 등 10여 명과 그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합쳐 50여 명 남짓한 의병이다.
의병을 창설한 곽재우는 맨 처음 자기 집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기도 있어야 한다. 의령 관아의 창고를 찾아갔다. 난리 통에 불에 타 아무것도 없다. 초계와 신반현의 창고를 뒤졌다. 거기서 무기와 군량을 확보했다. 그래도 부족하다. 강에 버려진 세곡선에서 세곡을 가져다 군량에 보탰다.
곽재우 의병은 이렇게 초라했지만 전투에 나섰다.
음력 5월 4일, 낙동강 하류 기강(岐江)나루에 나타난 왜선 3척을 공격했다. 이때 곽재우가 거느린 의병은 부장 4명이었다. 이틀 후인 6일, 같은 장소로 거슬러 올라오는 왜선 11척을 공격했다. 이때 곽재우 의병은 단 13명이었다.
정암진 전투에 투입되었을 때 곽재우는 불과 200명의 의병으로 일본군 2,000명을 상대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곽재우는 명실상부 의병장으로 인정을 받는다.
전라 감사 이광과 경상 감사 김수가 거느린 80,000명의 병사가 불과 1,600명의 왜군에게 대패한 용인 전투와 비교하면 곽재우의 지략이 뛰어나고 돋보인다.
곽재우는 선한 지도자였다. 농업에 종사할 때는 재물을 많이 모았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의병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는 지는 싸움에 의병을 투입하지 않았다. 의병들도 자연스럽게 그의 명령을 순순히 따랐다. 이런 지도력을 나는 ‘선한 지도력’이라 말하고, 그런 지도력을 발휘한 곽재우를 ‘선한 지도자’라고 말한다.
곽재우처럼 선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의령군에서는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6월 1일(음력 4월 22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곽재우의 선한 지도력을 본받는 날로 지켰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