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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노량 해전, 전쟁을 끝내다

수필. 임진왜란 제8부

by 수필가 고병균

일본군은 전쟁을 끝내고 싶다. 명량대첩에서 대패하고, 해상 보급로가 차단당하자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은 자국으로 철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했다. 그러던 차에 전쟁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은 이들을 순순히 보내줄 수 없다. 무엇인가 선물을 안겨주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이순신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바다 노량해협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하여 벌어진 해전이 노량해전(露梁海戰)이다. 1598년 음력 11월,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병사 약 7천 명, 판옥선 60척, 명 수군은 병사 1만 8천 명 판옥선 2척과 사선 300척이 동원되었고, 일본 수군은 병사 2만 3천 명에 함선은 최소 350척에서 최대 500여 척이 동원된 최대규모의 해전이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뇌물공세를 폈다. 진린이 고니시의 연락선을 포위망을 통과하게 했다. 이에 격노한 이순인 함대가 한산도까지 추격했으나 놓쳤다. 연락을 받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의 소 요시토시(고니시의 사위), 부산의 테라자와 히로타카 등을 창선도로 집결시켰다. 이로써 관음포에 매복 중인 조명연합군이 순천의 일본군과 창선도의 일본군 사이에 포위되는 처지에 놓였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항복의 《백사집》(1629년)에 기록된 이순신의 마지막 출정 전 맹세이다.

음력 11월 18일(양력 12월 15일) 늦은 오후, 출정을 맹세한 이순신은 소극적인 진린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연락선이 순천을 떠난 지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 많은 군사가 이를 것이다. 먼저 나아가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라고 하며 눈물로 간청했다. 그리고 명의 장수 진린과 등자룡에게 판옥선 1척씩 2척을 제공했다.

이순신은 함대를 셋으로 나눴다. 서쪽의 순천왜성을 공격하려는 극소수 함대, 동쪽의 노량해협을 포위하려는 본함대, 복병 함대 등이다.

그날 늦은 밤, 이순신의 극소수 함대가 순천 왜성을 향해 포격했다. 상륙할 것처럼 공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산에 불을 질러 긴급함을 알렸다. 창선도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불길을 보고 노량해협으로 들어왔다. 고니시를 꼼짝 못 하게 잡아두려는 작전이다

11월 19일 오전 2시경, 해류는 노량에서 순천 방향으로 흐른다. 그때 일본 함대가 노량해협을 통과했다. 깜깜한 밤이다. 조선의 극소수 함대가 포격을 시작했다. 일본 함선이 속수무책으로 격침당한 후에 조선 함대의 수가 적음을 파악했다. 공격 시점이 절묘했다

죽도에 매복해 있던 명 함대가 합류했다. 진린의 판옥선은 도독기를 높이 올리고 북을 치며 진격하고, 등자룡의 판옥선은 불랑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돌격했다.

오전 2~4시, 일본 함대가 관음포까지 유인되었을 때, 이순신 본 함대가 등장했다. 이로써 일본 함대는 3면으로 포위되었다. 본 함대는 첨자찰진(삼각형의 돌격형)으로 공격하고, 경상우수사 이순신(무의공)을 선봉장으로 어린진(전방이 두터운 방어형)으로 공격했다. 전진하는 일본 수군의 옆면에 파고들어 지휘부 쪽을 위협했다. 때마침 부는 북서풍을 이용해 불화살을 쏘아대며 화공까지 감행했다.

속은 것을 뒤늦게 깨달은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 군도 배를 출발시켰다.

오전 4~6시, 일본의 선봉대가 불능에 빠졌을 무렵, 시마즈는 상대적으로 약한 명나라 수군에게 총공세를 명령했다. 그때 등자룡의 판옥선에 불이 붙었다. 명나라 수군이 잘못 쏜 포에 맞은 것이 원인이었고, 등자룡은 전사했다. 그 여세를 몰아 진린의 판옥선으로 달려들었다. 이순신의 본 함대가 다가가서 위기의 진린을 구원하였다.

오전 6~8시, 바닷물의 방향이 바뀌었다. 물의 흐름이 노량해협을 지나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상은 관음포 만으로 향했다. 일본 수군은 거기서 박살이 났다.

오전 8~10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대장선을 집중 공격했다. 그러다가 시마즈 요시히로의 대장선(안택선)이 반파되어 위기에 처했다. 일본군 후방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군이 조선군의 후방을 찌르고 들어오면서 난전이 발생했다. 그러는 중에 조선군의 지휘관 이순신이 총에 맞았다. 한편 시마즈 요시히로는 가까스로 탈출하여 자국으로 쫓겨갔다.


노량해전이 끝났다. 공식적으로 1598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정오이다.

이로써 7년을 끌어온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났다.

그러나 아직 철수하지 못한 일본군이 있다. 남해 선소왜성(南海 船所倭城)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 1,000여 명, 고니시와 함께 철수하지 못한 일본군, 관음포로 상륙한 시마즈 군의 부장 카바야마 쿠다카 등이다. 이들은 청산도로 건너갔다. 해류가 굉장히 빠른 해협인데 뗏목을 타고 건너갔다.


11월 24일(양력 12월 21일), 이순신이 없는 남해섬 백성들에게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명의 장수 진린이 패잔병 소탕 작전을 펼친 것이다. 패잔병을 소탕하려면 패잔병이 건너간 창선도에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남해 섬에서 화공을 감행했다. 그 결과 일본군이 남겨놓은 군량미 3,000석이 불타고 다수의 민가도 불에 탔다. 피해는 고스란히 남해 섬 백성에게 돌아간 것이다. 27일(양력 12월 24일)에는 명의 장수 유정도 남해 섬으로 건너왔다. 그는 수급 챙기기에 급급했다. 산에 숨어있는 자는 일본의 패잔병인지 조선의 민간인인지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에서 돌아온 포로 6명에게도 그랬다.

남해 섬에서 아낙네들이 통곡한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통곡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도 통곡하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던 새댁도 통곡한다. 집집마다 땅을 치며 통곡한다. 머리를 산발한 채 통곡한다. 그러나 달래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이 더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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