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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8-10] 불쌍한 조선의 백성들

수필 임진왜란

이순신은 명량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남부 해상권 일부를 장악했다. 이때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계속된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일본군은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1598년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 철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했다. 


그러나 이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선물을 안겨주어야 한다. 이순신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바다 노량해협에서 기다리고 있다.     


노량 해전(露梁海戰)은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 11월 19일)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연합 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싸운 전투이다.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사천 선진리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 중이면의 다치바나 시게토라, 남해의 소 요시토시 등이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구출하고는 본국으로 퇴각하기 위해 노량으로 향했다.

이순신은 시마즈 함대가 노량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측하고, 명의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요청했다. 자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그날 밤 10시경에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매복했다. 


 전투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에 시작되었다.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해협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했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선들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다. 그 시각 순천 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의 일본 수군이 진린의 명 수군을 만나 거기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무려 4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되어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남은 전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했다. 조명연합 함대는 낮 12시까지 저들을 추격했다. 


적 함대를 추격하던 중 이순신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한편 고니시 군은 노량 해전의 혼란을 틈타 시마즈 군과 함께 부산으로 집결했으며, 거기에 대기하고 있던 가토군과 함께 일본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도 컸다. 사령관 이순신을 비롯해서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초계 군수 이언량 등이 전사했고, 병사도 3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명군의 장수 등자룡이 전사하고, 병사 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선도 1척의 손실이 있었다. 


일본의 피해는 더 엄청났다. 구원군에서 전선 200여 척이 침몰당하였고, 100여 척이 나포되었으며, 150여 척이 파손되고, 60,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주둔군도 전선 60여 척이 침몰하거나 파손되었고,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처럼 큰 피해를 보았음에도 일본은 노량 해전을 자기들의 승리라고 말한다.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사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울산 왜성의 가토 기요마사 등 지휘관이 모두 살아서 돌아갔는데, 조선의 사령관 이순신이 죽은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 그럴 만도 하다.


노량 해전에서도 진린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관망했다. 그러다가 조선 수군의 분투를 보고서야 참전했다. 그러던 중 일본 수군에 포위되어 죽게 되었는데 이순신의 도움을 받아 겨우 빠져나왔다. 진린에게 이순신은 생명의 은인이다. 이순신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 백성들에게 못된 짓만 저질렀다.      


임진왜란의 종전은 공식적으로 노량 해전이 끝난 1598년 12월 16일 정오이다. 그 이후 조명연합군은 비공식적으로 남해왜성의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남해 선소왜성(南海船所倭城)은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에 있는 성으로 1597년 11월에 왜장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축성했다. 오늘날은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천수대와 내성은 남아 있는 석축으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1,000여 명의 왜군 병력은 창선도로 건너갔다. 고니시와 함께 철수하지 못한 일본군, 관음포로 상륙한 시마즈 군의 부장 카바야마 쿠다카 등과 합류해 건너갔다. 뗏목을 타고 건너갔다.


12월 21일, 진린이 지휘하는 조명연합군이 패잔병 소탕 작전을 진행할 때, 일본군이 야산으로 도주했다. 못된 진린은 화공을 감행했다. 그 결과 일본군이 도망가면서 남겨놓은 군량미 3,000석을 태웠고, 많은 민간인이 화를 당했다. 24일에는 유정도 건너왔다. 그는 왜군의 수급 챙기기에 급급했다. 산에 숨어있는 자들의 목을 베었는데 일본의 패잔병과 조선의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에서 보내준 포로 6명에게도 그랬다.      


조선의 백성들은 정말 불쌍하다. 평상시에는 탐관오리들에게 당하고, 전쟁 중에는 왜군에게 당하고, 전쟁이 끝나고는 명군에게 당했다. 곳곳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목을 놓아 우는 아낙네가 있었으나 위로하는 이는 없다. 왕도 그랬고 대신들도 그랬다. 그저 자신들 살 궁리만 찾았다. 그때 백성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그것이 더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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