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진실한 사람, 곽재우

수필 임진왜란 제9부

by 수필가 고병균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다. 호남의 의병장 고경명에게는 금산 전투에서 순국했다. 그런데 영남의 의병장 곽재우에게는 뚜렷한 공적이 없다. 학창 시절에도 ‘홍의장군’ 곽재우라고만 배우지 못했다. 그 궁금증을 풀어 본다.


곽재우는 현풍 곽씨로 1552년 8월 28일(9월 16일),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도로명 주소로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2동길 33이다. 아버지 곽월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3남 1여 중 3남이다.

현풍 곽씨는 고려 때부터 현풍 지역에 뿌리내린 토호 집안이다. 고려 때 현풍이 밀양부에 속해 있었던 까닭에 밀양 박씨 집안과 혼맥을 이루며 위세를 떨친 가문이다.

곽월의 고조부는 곽안방(郭安邦), 그는 현풍 곽씨의 중시조이다. 그는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적개원종공신이다. 그는 중앙무대에서 활동하기보다 지방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 결과 자신은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고, 후손들은 피비린내 나는 사화에 휩둘리지 아니하며, 200년 이상 부자로 살아온 비결이라 여겨진다. 진정 현명한 선택이었다.

곽월의 증조부는 곽승화(郭承華), 그는 선산 김씨의 딸과 결혼했는데 선산 김씨는 김종직의 가문이다. 곽승화 본인도 김종직의 제자이자 훗날 조광조의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과 절친으로 지역 유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자였다.

곽월의 조부는 곽위(郭瑋), 그는 현감 벼슬을 지냈고 평산 신 씨 신승준의 딸과 혼인했는데 밀양 지역의 송계 신계성의 고모였다.

곽월의 아버지는 곽지번(郭之藩), 그는 진주 강씨와 혼인했다. 그녀의 친정아버지 곧 곽재우의 외조부 강응두는 의령의 세간리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부호이다. 김해 허씨, 의령 남씨, 의령 심씨, 의령 옥씨, 의령 여씨, 담양 전씨, 고성 이씨 등과 함께 의령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곽월(郭越)은 자기 고향 현풍현을 떠나 처가 동네인 세간리로 이주했다. 강씨는 무남독녀였기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듯하다. 곽재우의 나이 3살 때 어머니 강씨가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곽월은 장인의 가산은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것이다. 곽월은 새 장가를 들었는데 둘째 부인 허씨의 친정도 엄청 부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허경맥이고, 조선 전기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요,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첫 번째 부인 허씨와 4촌으로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곽월 자신도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 목사 황해 감사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곽재우는 고령의 소문난 부자 곽월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1585년 34세의 늦은 나이에 대과에 2등으로 급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곽재우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선조를 비판한 답안이 문제가 되어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또 35세 때 아버지 곽월이 사망했다.

아버지가 부자라고 해서 아들까지 부자인 것은 아니다. 나는 학창 시절 학비를 제때 낸 적이 없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장흥읍장까지 지내셨지만, 아버지는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었다.

그런데 곽제우는 달랐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부자라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의령에서 살았다. 곽재우는 6년 동안 농업 경영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았다.

초유사 김성일과 경상 감사 김수가 장계를 올릴 때 ‘곽재우의 재산이 많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부자가 되었다. 곽재우에게는 부를 축적하는 재주가 남달랐던 게 분명하다.


1592년 4월 임진오랜이 일어났다. 40세인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켰다. 평소 알고 지내던 심대승, 권란 그리고 그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합쳐 의병은 50명 남짓했다.

의병을 창설한 곽재우는 맨 처음 자기 집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래도 군량미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기도 부족했다. 곽재우 의병은 의령 관아의 창고를 뒤졌다.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초계와 신반현의 창고를 뒤졌다. 거기서 약간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했다. 그래도 부족하다. 강에 버려진 세곡선에서 군량미를 보탰다.

곽재우 의병군은 이렇듯 초라했지만, 전투에 나가서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1592년 음력 5월 4일, 낙동강 하류 기강(岐江) 나루에 나타난 왜선 3척을 공격했는데, 이때 곽재우 의병은 부장 4명이었다. 이틀 후인 6일 같은 장소로 올라온 왜선 11척을 공격했다. 이때 곽재우 의병은 13명이었다. 이것이 기강 전투이다.

200명으로 불어난 곽재우의 의병은 음력 5월 24일, 진주 남강 정암진에서 왜군 2,000명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다. 이게 정암진 전투이다.

이후 곽재우는 세간에 널리 알려졌고,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의병장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곽재우는 능력의 농업 경영인이었다. 농업에 종사한 기간이 불과 6년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를 부자라고 불릴 만큼 능력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이후의 곽재우는 이길 줄 아는 의병장이었다. 자기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는 의병장이었고, 의병들에게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기는 작전을 펼쳤다.

곽재우는 매사에 진실했을 것이다. 농업을 경영할 때 진실했었고, 의병장으로 활동할 때도 진실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믿고 신출귀몰한 작전을 철저하게 따랐을 것이다.


의령군에서는 6월 1일(음력 4월 22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이날은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날이다. 의령의 젊은이 중에 곽재우의 선한 지도력을 본받는 자가 하나둘 나타나면 좋겠다. 그런 지도자가 존경받는 사회로 변화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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