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 곽재우가 있다. 호남의 의병장 고경명과는 달리 곽재우는 업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행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곽재우는 현풍 곽씨로 1552년 8월 28일(9월 16일),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도로명 주소로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2동길 33이다. 아버지 곽월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3남1여 중 3남이다.
현풍 곽씨는 고려 때부터 현풍 지역에 뿌리내린 토호 집안이다. 고려 때 현풍이 밀양부에 속해 있었던 까닭에 밀양 박씨 집안과 혼맥을 이루며 위세를 떨친 가문이다.
곽월의 고조부는 곽안방(郭安邦), 그는 현풍 곽씨의 중시조이다. 그는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적개원종 공신이다. 그는 중앙무대에서 활동하기보다 지방에서 뿌리를 내렸다. 이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자신은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고, 후손들은 피비린내 나는 사화에 휩둘리지 아니하며, 200년 이상 부자로 살아온 비결이라 여겨진다.
곽월의 증조부는 곽승화(郭承華), 그는 선산 김씨의 딸과 결혼했는데 선산 김씨는 김종직의 가문이다. 곽승화 본인도 김종직의 제자이자 훗날 조광조의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과 절친으로 지역 유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자였다.
곽월의 조부는 곽위(郭瑋), 그는 현감 벼슬을 지냈고 평산 신 씨 신승준의 딸과 혼인했는데 밀양 지역의 송계 신계성의 고모였다.
곽월의 아버지는 곽지번(郭之藩), 그는 진주 강씨와 혼인했다. 그녀의 친정아버지 곧 곽재우의 외조부 강응두는 의령의 세간리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부호이다. 김해 허씨, 의령 남씨, 의령 심씨, 의령 옥씨, 의령 여씨, 담양 전씨, 고성 이씨 등과 함께 의령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곽월(郭越)은 자기 고향 현풍현을 떠나 처가 동네인 세간리로 이주했다. 강씨는 무남독녀였기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듯하다. 곽재우의 나이 3살 때 어머니 강씨가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곽월은 장인의 가산은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것이다. 곽월은 새 장가를 들었는데 둘째 부인 허씨의 친정도 엄청 부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허경맥이고, 조선 전기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요,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첫 번째 부인 허씨와 4촌으로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곽월 자신도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 목사 황해 감사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고령의 소문난 부장 곽월의 아들 곽재우는 34세 때인 1585년에 대과에 2등으로 급제했다. 그러나 선조를 비판한 답안으로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35세 때, 아버지 곽월이 사망했다. 이후 곽재우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쨌거나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6년 동안 의령에서 살면서 농업 경영에 힘썼다.
벼슬에 오르지도 못한 곽재우를 사람들은 부자라고 했다. 초유사 김성일과 경상 감사 김수는 장계를 올릴 때 ‘곽재우의 재산이 많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곽재우에게는 부를 축적하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자로 소문난 그가 1617년 4월 10일(5월 14일),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긴 것이라곤 단 벌 옷에 거문고와 낚싯배 한 척뿐이었다. 그 재산이 다 어디로 갔을까?
1592년 4월,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켰다. 평소 알고 지내던 심대승, 권란 등 선비들과 그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합쳐 의병은 50명 남짓했다.
의병을 창설한 곽재우는 맨 처음 자기 집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래도 군량미는 부족했다. 무기도 부족했다. 의령 관아의 창고를 뒤졌다.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초계와 신반현의 창고를 뒤졌다. 거기서 무기와 군량을 확보했다. 그래도 부족하다. 강에 버려진 세곡선에서 세곡을 가져다 군량미에 보탰다.
곽재우 의병은 이렇듯 초라했지만, 전투에 나가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음력 5월 4일, 낙동강 하류 기강(岐江) 나루에 나타난 왜선 3척을 공격했는데, 이때 곽재우 의병은 부장 4명이었으며, 이틀 후인 6일 같은 장소로 올라온 왜선 11척을 공격했는데, 이때 곽재우 의병은 13명이었다. 이것이 기강 전투이다.
의병은 순식간에 200명으로 불어났다. 곽재우의 의병은 진주 남강 정암진에서 왜군 2,000명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다. 이것이 곽재우의 이름을 세간에 알린 정암진 전투이다
곽재우의 지휘 능력은 뛰어났다. 80,000명이 넘는 조선군이 불과 1,600명의 왜군에게 대패한 용인 전투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곽재우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의병장이었다. 나라에서도 인정했다.
의병장 곽재우의 지도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자기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부하 의병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지는 싸움에 의병을 투입하지 않은 점이다. 의병장 곽재우는 전투에서 이길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런 까닭에 의병들도 그의 신출귀몰한 작전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따랐을 것이다. 그 결과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나는 이런 지도력을 ‘선한 지도력’이라 하고 그런 능력자를 ‘선한 지도자’라고 말한다.
곽재우는 진정 선한 지도자요, 선한 의병장이었다.
의령군에서는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4월 22일(양력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이날을 기하여 곽재우의 선한 지도력을 본받는 젊은이가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선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자가 성공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