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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핀체꾸이 Mar 24. 2024

브라질은 단순한 삶이 진리인 것처럼

그럼에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한국인의 푸념

드디어 내게도 선물처럼 단순한 삶이 찾아왔는데도 즐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신을 믿거나 종교에 의지하지 않으니 이 질문을 빌어 구할 누군가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내 안의 무언가가 대답하기를 바라면서, 이 질문을 전혀 던져본 적 없는 척 태연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누구에게도 티 내지 않고 내 안에서 휘몰아치는 풍랑을 없는 척 감추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브라질에서 드디어 그전에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평온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그전에 겪어온 상황과 삶들은 꼭 육각면체를 어렵게 굴리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뾰족하게 각이 지고 육중한 육각면체의 무언가를 꺼이꺼이 밀어 한 각을 넘어뜨리면 퉁-하고 한 면이 드디어 지면에 닿고, 한 발짝을 더 가기 위해 또 낑낑 밀어대어 다른 면이 퉁-하고 앞으로 겨우 나아가는 듯한. 매우 집요한 인내와 지난한 시간을 요하는 듯한. 브라질에서 사는 것은 마치 정사각형을 한 손으로 퍽퍽 밀어대는 것과 같다. 커다란 정사각형을 앞으로 한 칸씩만 더 밀면, 금세 앞으로 성큼성큼 직진할 수 있는 법이다. 똑같고 반복되지만 쉽고 무난하다, 단순하고 지루하다. 


브라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보통 대화의 주제가 무난하고 흔한 일상의 얘기들이 주된 것이라는 점이다. 머리 아프고 복잡하고 성가신 것들이 도마 위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는다. 꼭 옛날 '아따맘마'라는 만화가 떠오르는 것 같다. 귀엽고 무난하고 별 거 없는 일상들이 매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그런, 간단하고 별 거 없고 키득키득 웃기 좋은 그런 정도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내 지인들, 동료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등장하는 머리 아프고 복잡한 주제들, 가령 먹고살기 위한 일들. 먹고살기 위해 구해야 할 직장 이야기, 직장 안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골칫거리들, 가족 문제, 사회적 문제들, 그런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며 비판이며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소재들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나누었음을 뒤늦게 자각하게 되었다. 


이타콰치아라로 이사 오고 난 얼마 뒤, 나는 이 작은 동네에서 매주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작은 동네에도 신문 같은 소식지가 있다니,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주 소식지에 실린 가장 큰 뉴스는, 실종된 강아지를 찾는다는 누군가의 공고였다. 나와 여기 사는 이웃들의 삶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음은 서서히 알게 되었다. 괜찮은 직장에서 브라질 평균 연봉보다 높은 소득을 얻고, 조금 비싼 건물에서 월세를 지내며 살다가 근처 마트에서 며칠에 한 번씩 장을 보고 매 끼를 요리하고 이따금 puro suco(디저트와 주스 프랜차이즈)나 카페에 가서 주스나 한 모금 들이켜 보는. 주말에는 니테로이에서 몰려드는 인파를 헤쳐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수영 좀 하다 4-5시에는 집으로 돌아와 집 청소를 하거나 티브이를 보다 노곤해 잠에 빠지는 그런 일상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 동네에서 가장 요란스러운 것은 몇 주에 한 번씩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몰아치는 비바람과 천둥뿐이다. 


나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의 삶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따금 거주 1년 차에도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공허함, 내 불안정한 수익으로 언제까지 여기서 월세 따박따박 내며 버틸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함이 그저 고개를 들이민다. 아직도 초보자 딱지를 떼지 못한 내 포르투갈어는 억울하다며 항변할 수 없는 내 게으름의 증거가 되었다. 이제 앞으로 여기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렸다.


작년까지 근무했던 한국어 학원에서 월급을 떼이고 협박을 받았던 나는 그 대표를 노동청에 고발하고 법적 처분을 내리게 하겠다는 단호한 분노와 억울함으로 경직된 몇 달을 보냈다. 나는 그  대표의 법적 처벌을 위한 증거들의 명확함, 상식적인 논리와 설득은 무용지물이므로 그저 고발과 처벌만이 정답이 될 이 명료한 사건들을 계속 곱씹으면서 내 안에서 치솟는 감정들을 은은하게 삭혀왔다. 이런 모든 일들이 예민한 내게 여진과 같은 일상의 흔들림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내 성격이 더해져, 나는 점점 브라질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름 한 방울 마냥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인생은 고통이고 행복은 그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열매와 꿀이라고 생각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브라질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브라질 사람들의 천연덕스러운 단순함과 긍정적임은 삶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우습다!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의 단순한 원리와 일상이 내가 바라던 이상향이 아니었는지? 나는 이런 곳에서 살면 그토록 염원하던 평화와 여유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나는 그것에 내 몸을 맡긴 듯이 그저 동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유토피아 같은 감상은 한 달 밖에 가지 못하고, 내 속에는 여전히 폭풍의 언덕이 꿰차고 있다. 이런 곳에서 여유 단 한 톨 찾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많이 여유로워졌고, 더 자주 미소를 짓게 되었다. 그런데도 남자친구는 아직 나를 보면서 말한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그렇게 심각하고 복잡해?' 나와 오랜 냉전을 겪다가 날 좋은 날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며 그런 소리를 던진다. 아- 맞다. 이렇게 날 좋은 날, 이렇게 날 좋고 풍경 좋고 달콤한 이곳에 살면서 뭐가 그렇게 심각하고 복잡해? 그런데 나는 그런 소리를 하는 남자친구의 단순함과 순진함에 불호령을 내리고 싶어졌다. 인생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고!


바다, 햇살, 바람, 수평선의 앞에서 썩어버린 사과를 생각하는 나는 아마 영원히 브라질의 단순함을 닮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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