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첨지 May 28. 2022

블락된 댓글

#왜일까, #누구냐넌, #도움이되려고한건데, #그렇다면야

제목이 흥미로워 클릭했다.
유튜브에 스타 인강 강사들이 모여 수험생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영상이 우연찮게 추천 동영상으로 떠서 보게 되었다. 의대생인데 문사철에 흥미가 있고 업으로 삼고 싶으나 미래가 불투명해 무섭다 어찌해야하나, 대충 이런 질문이었다. 

학창시절 극렬히 고민하던 주제라 반가와 영상을 봤는데, 선생님들 답변에 적잖이 실망을 했다.
그냥 딱 동네 아저씨들이 말할 수준에 한 분은 말꼬투리를 잡으며 꼰대력 충만. 
스타 강사인거는 알겠는데 저런 분야는 본인들 주전공도 아니면서, 모르면 모른다고 하시지 귀동냥으로 들은 수준으로 말하는게 짜증이 났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댓글을 달았는데 이거야 왠걸.
댓글에 좋다싫다 반응이 없어 보니 다른 사람이 안보이게 블락되어 있었다.
'다른 의견' 이라고 해서 영상 관계자가 반감을 샀으려나..
아쉬울거 없다 하며 나도 댓글을 지웠다. 


시간을 들여 쓴 댓글이라 아쉬워서 여기에 남겨놓는다.

질문한 학생이 보지 못할 것이 아쉽다.

------------------------------------------------------------------------------------------------------------------------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미국 모 대학병원에서 전공의로 수련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우연히 연관 동영상으로 떠서 보게 되었네요. 

20대에 비슷한 질문을 가졌던 사람으로 댓글을 남깁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써서 두서가 없으니 미리 양해를 합니다.

영상 속 선생님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이 매우 건강한 지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나고 자라면서 의식이 생기고 이에 동반해 자연스럽게 가지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창조자는 존재하는가, 하늘 너머 땅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의식을 가진 생명체는 인간 뿐인가 등등. 이런 종류의 근원적 물음에 답을 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고 현대에선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 등의 단어들을 통해 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문사철이나 과학이나 기본 뿌리는 저런 근원적 물음에 답을 하고자 하는 과정에 존재하고 시대가 흐르고 뿌리가 가지를 치듯이 학문도 여러 방면으로 발달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동시에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포유동물의 특성을 공유하는 개체로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예외 없이 발생하는 질병, 분쟁, 의식주 등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장애들을 극복하려는 시도와 기본적인 욕구인 호기심을 통해 오늘날 인간 문명이 존재합니다. 


거대한 흐름에 참여한 인간들의 삶과 저작에 대해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호기심입니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에 가는 과정이 치열해서 진학 전까지는 상기 과정들을 음미하기 쉽지 않고 문이과로 나뉘어 다른 학문 접근성이 떨어지며 또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결과를 내기 어려운 기초 학문의 특성 상 관련 전공자들이 조명을 받고 대중성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 라는 점 때문에 해당 주제의 진지한 고려가 대중 사이엔 공유 되어있지 않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물음을 가지고 학생 시절, 수업은 뒤로 한 채 독서에 매진 했었습니다. 같은 욕구를 가졌었고 미국의 liberal arts college에 갈까도 고민을 했었습니다. 


서구권에서는 교양에 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는 의대나 법대가 대학원 체제로 학부 이후 진학을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대학원에 가기 전에 '교양대학 (liberal arts college)' 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교양을 가다듬습니다.
예를 들면 스티브 잡스가 중퇴한 리드 칼리지나 힐러리 클린턴의 모교인 웰슬리 칼리지 등이 있겠네요. 교양이라 하면 인간 문명의 거인들 (주로 서양권)의 저작을 시간을 들여 해석하고 이를 주제로 토론하는 과정 거쳐 형성되는 상식의 일종 이라고 여겨 집니다. 지식인들끼리 통용되는 상식 정도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작들은 문사철을 포함해 과학 서적도 다루고 있습니다.
위의 한XX 선생님이 언급하신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라던지 스피노자의 '에티카' 뿐만 아니라 고전 범위는 매우 방대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권의 의대생들은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한국의 6년제 의과대학 형식은 일본의 그것을 본따 만든 것입니다.
2년 예과+4년 본과 라는 체계는 일본제국시절 전쟁에 필요한 의료 인력의 빠른 수급 + 현 대학 과정에 해당하는 상당 부분을 일본 구제 고등학교에서 다뤘다는 이유로 4+4의 미국 학제를 2+4로 줄인 형태이며 아직도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교양 과정이 많이 빠져있지요.


얘기가 너무 길어지네요 최대한 줄여보겠습니다. 

책들을 장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느라 (주로 논피션) 성적은 안습이었습니다만, 저만의 시각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식 수준은 지금도 관련 전공자와 대담을 나누기엔 한참 모자른 수준 입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독서에 빠져있던 시간은 자아 형성의 큰 밑거름이 되었고 충만한 몰입의 시기었습니다.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고 지적 허영심도 커져 으스대기도 했지만 재미난 시기였습니다.

한편으론 그럴듯한 책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당위성에 빠져서 (이런 것도 모르면 안되지, 이건 읽어야해, 필수교양이다!) 읽다가 번아웃을 겪기도 했었지요. 문사철의 정규 과정을 밟았다면 후회를 했었을 것 같네요. 제 의식은 보다 현실적으로 tangible 한 것을 하고 싶다는 쪽으로 흘러왔거든요. 지금은 취미 수준에 머물러도 좋다 라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난다면 다시 학부나 대학원 수준에서 정규 과정을 밟고 싶기도 합니다. 번역도 배워보고 싶구요. 영상의 선생님들이 인문학은 답이 없고 혼자 해가는 과정이라고 말씀을 해주시긴 했지만 그건 상당히 advanced 과정이고 실제로 전문 학자들이 고전을 다루기 위해선 기본적 tool 들이 존재합니다. 
 
철학을 일례로 필수 tool 중 하나는 언어입니다.
서양 고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영어, 프랑스어, 독어, 그리스어, 라틴어 정도가, 동양 고전으로는 한자가 필요 합니다. 한국어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불리는 소크라테스 대화 편도 최근까지 제대로 완역 되지 않았었고 라틴, 그리스어 하는 분들도 아주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존재하는 번역본들도 솔직히 퀄리티가 좋지 않습니다. 잘 읽히지 않아요.
옆나라 일본만 해도 수 십년 전부터 완역 되어 있는 것을 보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런 언어들을 통해 고전들을 하루 한페이지 두페이지 천천히 읽어가며 땀 흘리는 과정이 있습니다. 기본이라고 여겨지는 저작들을 읽어내고 같은 목적과 열정 공유하는 사람들과 토론하며 권위자로 부터 해석을 듣고 소화해내는 지난한 시간들, 이걸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은 정규 과정 밖에 없습니다. 이런 과정들 이후가 '혼자 해가는 과정' 이지 그 전까지는 저런 기본 수련은 필수 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골방에서 혼자 책 읽을 수 있겠지만 방향성을 잡기는 어렵습니다.


요약 하겠습니다.

1. 건강하며 자연스러운 호기심/욕구다. 

2. 아직 의대는 그만두지 마라. 사업을 하더라도 회사를 다니면서 구상하는 것이 안정감을 통해 훨씬 성공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한다고 해서 성공률이 높아지는 건 전혀 아니다. 

3. 본인의 욕구가 지적 허영심인지, 하늘이 내려준 부름에 대한 응답 인지 알아내야 한다. 

4. 스피노자 에티카 같은건 아직 읽어 보지마라. 이건 마치 의대 지원하려는 사람한테 내과 해리슨 읽어보라고 하고 못 읽으면 의대 가지 말라고 하는 거랑 비슷한 얘기다. 저런 높은 수준의 책을 읽으려면 단계들이 필요하다. 그 전에 많은 기본서, 해설서 등을 읽고 천천히 흥미를 유지하면서 가야 한다. 

5. 문사철 분야의 현실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귓동냥 말고 본인이 직접 목도해라. 관련자들 찾아가서 수업도 들어보고 얘기도 해봐라. 실제로 그 사람들이 뭘하는지 봐라. 

6. 별로 도움은 안되겠지만 모교 의료인문학 교실 찾아가봐라.

7. 책 계속 읽어라. 절대 흥미 위주로 읽어라. 괜히 어려운 거 읽다 지치지 말고 천천히 재미있는 책 위주로 읽다 보면 어려운 책들도 언젠가 읽을 수 있다.

8. 중앙 동아리 같은 거 해서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고 토론 많이 해봐라.

9. 인문학은 혼자하는게 아니다. 길은 사회에 있고 필요할땐 도움을 요청해라.

10. 책 읽다가 재밌으면 저자한테 연락해봐라. 생각보다 쉽게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요즘 애들은 못말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