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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Oct 31. 2023

플라워킬링문

난 죽을 때까지 영화를  놓치지 않을 거야.


연세가 80살 이상이신 된 감독들을 떠올려보자.  허우샤오시엔이 건강 문제로 은퇴를 했고, 84살인 하야오는 사실상 은퇴를 하였다. 친구였던 프란시스 코폴라는 감독보다 '대부'의 지위를 가문에 활용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스필버그는 더 이상 블록버스터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웃사촌인 우디 알렌 정도만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영화 만들기를 반복한다.  만약에 나이만으로 한정 짓지 않고 성향으로 한정을 짓는다면 미국 내에서 그에게 동료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바다를 건너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고향이자 이탈리아 본국에서 벨로치오만이 남아있다.) 마틴 후대에도 지금 미국에 대해 이렇게 집요하리만치 파고드는 감독이 있던가. 


아이리시맨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는 레오네와 코폴라의 영향력을 아래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구축하고 종결하고자 명배우들을 캐스팅하였다. 당연하게도 7,80년대를 호령했던 노년의 배우들은 그의 부탁에 기꺼이 응답했다. 단순히 '갱스터 장르 정리'만 하였다면 아이리시맨이 이렇게까지 호평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중간에 훅훅 바꾸는 장인의 기술보다 갱스터의 역사와 영화의 자화상을 교묘하게 겹쳐 그리고자 하는 야망이다.  (그렇기에 나에겐  아이리시맨의 최고의 장면은 차 안에서 '냉동참치'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다. )



그렇다면 플라워 킬링 문에서 마틴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용만 보자면 사실 이 영화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작품 '언터처블의 알 카포네'를 그대로 데리고 와서 사막에서 다시 그린 영화이다. 드니로는 자신의 연기를 아주 능글맞게 복제를 하였고, 디카프리오는 마틴의 영화에서 늘 그래왔듯 연약과 무기력하지만 허세가 짱짱한 연기를 보여준다.  감독 스스로도 자신이 인디언의 시선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고 아예 작정하고 백인들의 뒷모습을 보여주기 바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의 리듬감 속에 기이한 것들이 발견된다. 그건 소리이다.

오세이시족끼리 말을 하거나 부부가 말을 나눌 때 대사가 나오지 않는 '언어'적인 장면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소리'는 굉장히 특이한 리듬으로 배치가 된다. 몰리와 어니스트가 처음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둘이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폭풍이 몰아친다. 그런데 그 폭풍 소리는 이 둘의 대화 사이에 배치가 된다. 통상적으로 폭풍의 이미지(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보여주는) 대신 소리로서 그들의 대화를 방해한 것이다.


하나 더. 영화 속 인물들이 취조를 당할 때,  혹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내레이션은 이미지와 일치되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배치가 되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이미지만 보여주고 대사로 그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거나, 대사로 말하고 뒤에 이미지가 따라오는 식이다.



이는 후반부로 성질이 갈수록 극명해진다. 그곳 사람들 대부분이 사건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소리(진술)가 우선시 된다. 이는 영화 초반 단순한 이미지 혹은 이미지에 종속된 자막으로 보여주는 사진, 영상 그리고 뉴스의 이미지들과 전혀 다른 태도인 것이다.  후반부에 갈수록 서사는 이미지로써 다시 재현이 되지 않고 관객의 기억력을 믿으며 오직 소리로만 진행시킨다.  소리는 캐릭터들의 진심, 진실, 변심을 담고 발산된다. 감독은 소리가 평면적인 이미지로부터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에너지라는 성질에 주목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영화 속의 이미지들은 진실이 아닌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독이 힘을 주고 표현한 몇몇 이미지들은 대부분 캐릭터들의 감정에 집중하여 표현되었다.  후반부에 몰리가 계속 말하는 '이것이 진짜인가요?'는 여기에 대한 감독의 질문인 셈이다. 


그 질문에 끝에서 예상치 못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가장 뜨악스러운 지점인데 결말 부분에 어떠한 재현의 이미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퀀스 자체를 오직 소리로서 할애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그냥 '소리'가 아니라 '소리의 재현'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의 소리의 재현은 이미지의 재현과 비교했을 때 얼마만큼의 힘이 있는지, 이미지로부터 독립적일 수가 있는지, 그리고 진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새로운 논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에 아주 현명하게도 마틴 스스로가 직접 나와서 이 논제를 던진다. 물론 에드가 후버의 제작으로 만들어진 쇼였지만. 


이 지점에서 마틴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증폭된다.  마틴이 이렇게 집요하리만큼 미국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혹시 미국 프런티어의 역사 위에 영화 언어의 역사를 겹쳐놓고 확장, 수정, 발전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래서 그의 출연이 시네마에 대한 거대한 숙명 또는 집착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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