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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Dec 18. 2023

괴물을 다시 보다

무너트리다.


참으로 오랜만에 똑같은 영화를 여러번 보았다. 헤어질 결심을 두번 본 이후에 처음이니 1년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은 책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새롭듯이 좋은 영화 또한 몇 번을 다시 봐도 새롭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번 영화도 그랬다. 수많은 의문들이 그대로 남아있던 상태에서 3차 관람을 하였지만 2차 관람 당시 내가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전복시키면서 다른 의구심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평론가가 영화를 '술'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술'이 될지 '물'이 될지는 관객이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를 '술'로 받아들인다면 책 또한 '술'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도 '술'이 아닌 '물'로서 받아들이는 좋은 지인들과 같이 영화를 관람 후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두 분 다 누군가 이것을 BL로 소비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또한  '이 사람도 괴물이 아니고 저 사람도 괴물이 아니라며 괴물을 찾는 형식 자체가 거북하다'라고 말한  촬영 감독의 말을 빗대어 영화를 단순히 그렇게 보는 자세에 우려를 표했다. 실제로 리뷰를 보면 아이들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리뷰 또한 적지 않다.


결국 영화는 각자의 위치에서 보는 것이라고 말했던 '컷'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내 위치에서 보는 세 번째 감상평을 말하고자 한다.


결국 넘어야 한다.

지난번 리뷰와 생각의 결을 조금은 달리한다.  여전히 교장선생이 눈에 걸리지만 결국 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영화는 왜 사오리의 시점에서 시작하는가부터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일단 이 영화에서 나오는 주요 어른에 대해 알아보자. 이 영화에서 사오리는 싱글맘이자 노동자이고 아이를 위해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이는 호리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한 여성에게 고백을 한, 결혼을 꿈꾸는 사람이자  노동자이고 자신의 오해를 풀고 싶어 한다. 교장선생은  진실보다 학교의 보존을 택하는 사람이며  요리의 아버지는 부동산업을 하는 사람이다.


걸스바에 불을 지른 사람이 요리가 맞다고 한다면,  그 건물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사오리가 목격하면서 시작한다. 엄마의 빈자리와 더불어 아버지의 단골집인 걸스바로 유추 가능한,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매춘과 여성성이라면 (그는 식물에 물을 준다.) 이 불은 단순히 폭력을 행사한 아빠를 향한 복수극이라기 보다 젠더성을 강요하고 기존 가족을 강요한 고정관념에 대한 파괴이자 반항이다.  

당연히도 이 불을 제일 먼저 봐야 하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인 사오리여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오리는 가족이 깨진 것과 다름이 없지만 미나토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가족을 넌지시 강요한다. 사오리가 미나토에게 그토록 강조한 '선'인 규범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 차로 사고를 낸다. )


두 번째로 영화는 화재 장면을 학교에서의 담당인 호리 선생이 목격하도록 한다. 영화는 은근슬쩍 담임인 호리 선생과 미나토의 유사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얼핏 보면 미나토의 미래의 모습 같지만 미나토 스스로가 차에서 뛰어내림으로써 호리가 은연중에 강요한 기존의 남성성에 반대한다. (그가 옥상으로 간 것은 여자친구가 떠난 뒤 학교를 찾아왔을 때이다.)  그러니깐 어른들의 강요하는 신념과 달리 미나토는 뛰어내렸고, 요리는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을 가두는 것을 파괴한 셈이다.


태풍

사오리와 호리가 마주치는 불이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거대한 형태의 붕괴라면 교장 선생은 다르다.  면회실 장면에서 남편이 교장선생에게 물어본다. "묘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그러자 교장 선생은 "다른 곳에다 할 거라고 해요. 그게 차라리 나아요"라고 말을 한다. 이미 본인들이 원했던 가족의 형태는 무너졌다. 교장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사진을 봐서도 알겠지만 그녀의 가족이라는 형태는 이미 불에 타 붕괴되고 있다.  


수많은 부감 시점이 나와도  전소된 건물이 영화 속 마을에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오리가 화재 현장을 발견하였을 때 나오는 소방차 소리, 호리 선생이 건물 꼭대기로 올라갔을 때 들었던 소리 (여자친구가 떠나간 뒤 그는 학교에 방문한다.), 교장 선생이 물가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들었던 소방차 소리는 그들의 각자의 마음에서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기존에 사고대로 구성하던 '가족'이라는 형태의 건물은 전소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물인것  마냥 식물에 물을 주고 아들을 물고문했던 요리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감독은 태풍으로서 그 형태들을 붕괴, 전소, 차단시키며 아이들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준다.  이는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보여준 '태풍'과는 다른 의미의 태풍인 셈이다.


아이들, 세계의 배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면, 엄석대가 새로 온 선생에 의해 권력이 무너졌을 때, 급우들이 선생님에게 그동안의 진실을 고하는 장면이 있다. 어렸을 적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던 장면인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사회의 단면을 유추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그 누구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 내리지 않는 것처럼 이 영화의 아이들이 정말로 '아이'인가에 대해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건 교내 폭력이나 괴롭힘보다도 선생님의 걸스바 소문을 낸 아이가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에 가서 괴롭히던 아이들조차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세상을 영화가 요리와 미나토에게 선물해 주었을 때 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다른 선택이다. 그가 아이들을 배제하는 결말을 준 영화가 있었던가?


여기에 더해 영화 내에 요리의 시선과 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뻗어보고 싶다.(오프닝에서 그 아이의 뒷모습만 보여준다.) 감독의 기존 세계를 배신하였다는 것과 기존 세계의 붕괴와 화재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면  영화 내에서  요리의 시선이 존재하 않는 이유는 기존에 고수하던 가족의 형태가 있는 한 요리의 시선이나 시점은 존재할 수 없다고 감독은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배신해가며 새로운 결말에 도달한 것이다.

필자는 여태까지 고레에다의 세계를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고민과 반성으로 자신의 필모를 '어느가족'까지 끌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아예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가면서 자신이 주장하던, 혹은 뻗어나가던  세계들을 화재 시키고 전소한다. 여기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던 요리의 아버지와 거대한 운명에 수긍하던 교장선생의 표정, 그리고 아이들조차 새로운 세계에 초대받지 않는 결말이 유독 쓸쓸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사족

1.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신생아 특례 대출론 때문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한 명을 낳으면 1.6%인데 4년 차에 한 명을 더 낳아야 이율이 유지된다는 이야기는 정부가 원하는 가족의 형태가 4인 가족이라는 점이다. 미안하지만 자녀계획은 부모가 하는 것이고 아이들은 경품이 아니다. 두 남녀가 임신하는 공장도 임신 시키는 기계 도한 아니다. 정부는 이런 병신 같은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2. 류이치 사카모토가 동일본 대지진 때 부서진 피아노를 수리하여 연주, 공연하였다는 뉴스를 떠올려 보니  이 영화와의 운명은 필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반골 기질인  대음악가가 부서진 피아노를 수리하여 다시 연주한 것은 그때의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닌 그 사건으로 피해 보았던 모든 사람들을 위로함이었을 테니.  


3. 조그만한 지혜를 준 두 지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쓸데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떠들었는데...잘 들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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