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영화감독에게 있어 코로나는 무슨 의미였을까?
라두 주데처럼 소비층의 반지성주의나 루벤 외스틀룬트처럼 가부장- 혹은 체제 자체의 붕괴 일 수도 있다.
혹은 박찬욱이나 클로이 자오처럼 주체에서 경계로 밀려나는 국가 혹은 자발적 이주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 있어 코로나는 무슨 의미였을까? 영화 산업으로 한정하자면 '극장'이라는 장소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몰락(혹은 확장)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 기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무성에서 유성의 시대를 거쳐 온 영화에게 있어 코로나라는 것은 타의적 후퇴이지 않을까 싶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시대는 소리가 제대로 녹음이 안된다는 것이고, 후시 녹음으로 따로 처리하거나 자막의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 물론 톰 크루즈나 다른 할리우드 영화처럼 그 기간이 마치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도 된다. ) 강제적으로 후퇴하며 사운드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내가 말하는 것을 되게 이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영화라는 것은 애초에 물질의 형태도, 생명이 존재하지 않으니깐.
그런데 우리은 예술의 생명력이라는 특이한 수식어를 사용하여 영화의 생명력을 논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생명이란 인간의 기억과 감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며, 이 전제는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계속 영화가 상영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을 유운성은 바쟁과 고다르의 말을 빌려 이것이 '영화'라고 표현한다. 이 기본적인 전제하에 조금 더 나아가 보자면, 인간의 야외 활동 금지 및 마스크 의무화는 '영화'라는 성질을 변질하게 만든다. 그 어떤 영화도 사람이 마스크를 쓰는데 소리를 제대로 담을 수가 없다. 하지만 영화는 'Must goes on'이 되어야 하는 산업이고 희한하게도 영화는 자체가 멸균이 되어 버렸다. 영화 산업 자체가 영화의 타의적 후퇴를 거부한 것이다.
정성일의 표현처럼 영화 안의 멸균의 세계와 영화 밖의 코로나의 세계는 그렇게 분리가 되었다. 소리와 이미지의 필연적 분리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분기점이 발생한 것이다. 이 영향 때문인지 요 근래 영화들은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연출에 접근한다. 소재로서는 포스트 휴머니즘을 비롯하여 멀티버스를 자주 사용하였고, 영화의 성질인 사운드와 이미지를 동일선상에 놓지 않는다.
현재 감독들 중에 이것에 매달린 감독은 누가 뭐래도 하마구치 류스케이다. (이건 필히 그의 스승인 기요시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 아사코를 거쳐 최근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보여주는 트렁크 닫는 소리가 주인공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시퀀스라든지, 새로운 곳으로 방문했을 때 나타나는 정적인 이미지들처럼 (어린이집, 도시의 전경) 이미지에 종속된 사운드가 아니라 사운드에 종속된 이미지로 표출된다. 코로나 시절에 영화가 보여주었어야 했던 '사실'은 '시차'를 두고 다른 방식으로서 영화상에 작용되는 셈이다.
이 운동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다. '시차'로 인한 작용들은 사실 무성에서 유성으로 넘어가는 시절에 자주 나왔던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로 프리츠 랑의 작품이 있겠다. 그는 '마부제 박사(1922)' 이후 사운드가 탄생하고 난 뒤 '마부제의 유언(1933)'을 발표한다. 그는 그 작품에서 사운드와 이미지를 때론 분리시키고 때론 중첩시킨다. 중첩과 분리라는 운동의 결과는 실제의 사회 분위기인 '나치'와 급변하는 매체인 '영화'라는 유령으로 환원되며, 사운드를 통해 실체를 조종한다. 사운드에 종속되는 이미지라는 새로운 관계는 역사와 교묘하게 중첩되는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21세기의 조종의 주체를 병균이 아니라 '자본'으로 한정하고 사운드와 이미지의 이 '시차'를 자연과 이성의 시차, 의식과 무의식의 시차, 자본의 시차로 받아들인다. 점프 숏을 한다고 해서 영화 안과 밖의 시차를 자본의 높낮이를 따라잡을 수 없고, 롱테이크를 한다고 한들 자연과 인간의 시점의 차이를 좁힐 수 없다. 차 안에서의 적막함을 깨는 '알람 하나' 또한 두 사람의 차이를 좁힐 수 없다.
결국 끝은 큐어이다. 그리고 큐어의 끝은 마부작의 혼령처럼 패잔병 3세대의 행위로 중첩이 된다. 걱정되는 부분은 그의 출신뿐 아니라 장소가 안개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안개일까 아니면 기요시의 큐어 속 안개일까? 어쩌면 이미 답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이 부분이 정말 야비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쨌든 감독이 Title에서 강조한 'Not'은 그의 스승 기요시의 대표작인 'Cure'만큼이나 이중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