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유롭게 하는 훈련
폭로된 비밀의 효과는 폭로를 들어주는 사람에 달려 있고,
폭로자 자신이 듣는 이를 얼마나 신뢰하는가에 달려 있다.
보리스 시륄리크, 《불행의 놀라운 치유력》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첫째, 글을 읽을 때만큼은 마음속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완전히 상대의 입장에서 글에 몰입해야 한다. 치유를 위한 글쓰기는 그 어떤 것이라도 주제가 될 수 있다. 피해자의 이야기라면 그래도 용인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가 금기시하는 외도나 낙태, 폭력과 모성성의 결여, 그 밖의 여러 가지 성적 욕망 등에 대한 고백이라면 어떻겠는가? 내 마음의 원칙이 강할수록, 도덕적 잣대가 엄격하고 순수함에 대한 희구가 강할수록 틀에서 벗어난 글을 읽기가 힘들다. 결국은 그런 틀로 인해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마음의 치유란 세상과 자신에게 쳐놓은 울타리와 틀을 걷어내는 작업일 수 있다. 그 틀 속에 갇혀 꼼짝하지 못
했던 나를, 울타리를 깊이 박느라 피 흘리던 나를 자유롭게 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작업이다. 타인의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이같은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해하고, 그 넓어진 품으로 다시 나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치료가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비블리오 테라피》의 저자 조셉 골드는 인간은 자기 경험의 한계나 자신의 스토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데, 그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타인의 스토리’라고 말한다.
만약 상대의 글을 읽다가 어떤 대목, 어느 문장, 혹은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면 내 안의 어떤 틀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상대의 글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릴 틈이 없다. 그 글을 읽는 나의 아우성과 내면의 요구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유하는 글쓰기는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치유의 과정이 된다.
글은 남지만 인간은 변한다
두 번째로 글을 읽는 사람들은 글쓴이가 쉴 새 없이 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변화무쌍하다. 극단에서 극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갔다 하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자리에 가 있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의 마음은 재빨리 도망치거나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간다.
반면에 글은 한번 쓰고 나면 고정된다. 고정되어 있어서 자신을 직면할 수 있지만, 그만큼 고정된 글에 갇히기도 쉽다. 특히 타인의 글을 읽을 때 그렇다. 과거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이 변화된 지금의 그를 재단한다. 이미 그때의 그가 아닌데 말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그 이름이 명성을 의미할지라도 고정된 틀에 사로잡히는 게 싫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글은 남지만 인간은 변한다’고. 특히 그 글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자기 반성적 글을 쓰면서 그는 이미 이 자리를 떠났는데, 남은 자들이 그의 글에 붙잡혀 있다. 사람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남긴 글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그의 주관적 진실을 인정하라
세 번째는 타인의 고백을 듣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망각 또는 왜곡하거나, 사실보다 훨씬 과장해서 말한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갈등의 상대를 악의적으로 묘사할 때도 있다. 그런 경우,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상대의 이야기에 빠져 경악할 것이다. 아, 세상에. 그런나쁜 인간이 있다니! 이렇게 불쌍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다니! 그러면서 말한 자보다 더 흥분해서 며칠 밤잠을 설칠지도 모른다.
반대로 타인의 이야기에 몇 번 속아본 사람이라면 수사관의 눈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시는 당신의 호들갑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상대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던데. 솔직히 그렇게 죽을 것처럼 힘든 건 아니지? 관계가 그렇게 되도록 너도 자극한 게 있지? 너 또 상황을 과장하고 있는 거지?’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내면의 수사관이 아무리 예리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들어도 ‘진실’은 확인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절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똑같은 글이나 말을 접하고도 전혀 다르게 기억할 때가 많다. 똑같은 영상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각기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는 속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진실의 다의성을 인정하면 된다. 각기 나름의 진실이 있다. 나름의 진실
이란 절대적 객관성의 기준에 맞춰 판단한 게 아니라 ‘나혹은 그가 체험한 주관적 진실’이다. 만약 어떤 이가 “그가 죽일 듯이 나에게 덤벼들었다”고 말한다면, 그 당시 정황이야 어찌 됐든 말한 이는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느꼈을 것이다.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면아이의 시선에서 보자면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상대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기억은 내게 불리해서 나도 모르게 지우거나 왜곡할 수 있지만, 그 또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상처가
그 사람은 아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어떤 사람이 가진 상처가 아주 크고 깊다고 해도 그 하나로 그의 모든 것을 설명
하려고 하지는 말자. 어린 시절의 상처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만들었다고 우기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다. 유아기의 경험이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는 심리학의 대중화가 가져온 문제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트라우마나 상처로 규정하는 것은 폭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겪었다니 지금 정상일 리 없어, 강하게 부정하는 거 보니 상처를 감추고 싶은가 보네, 부모가 이혼했다더니 상실 트라우마 때문에 저러는 건가 봐...... 그런 마음으로는 상대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 첫 번째 목적은 그를 비판하거나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해받는 것만으로도 아픔은 치유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당연한 목적을 자주 잊어버리고 딴 길에서 헤맨다. 그럴 때 우리 자신과 상대는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결국
나 자신의 문제와 연결된다.
타인의 고통과 문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가진 고정관념이나 틀에 박힌 사고방식,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의 한계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된다. 어찌 보면 타인을 공감하기 위한 노력은 나 자신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훈련이기도 하다.
그러니 공감하는 과정에서 힘든 것은 상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틀을 깨느라고 힘든 것이다. 만약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싶거든, 영혼까지 자유로운 삶을 원하거든 타인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보라. 그러면서도 쉼 없이 공감하는 이 순간이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순간임을 자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