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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봄 Aug 01. 2022

"선생님, 아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혹시 아빠의 키가 어떻게 되나요?”


마흔이 넘도록 한국에서 살다 난생처음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유독 미남이 많다는 것이다. 연구원으로 대학 캠퍼스를 방문한 첫날, 몇 분에 한 번 꼴로 마주치는 훤칠한 청년들 덕분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별로 멋을 내지도 않고 헐렁한 후드 티셔츠에 반바지를 걸치고 보드를 타는 학생들은 180센티미터는 족히 넘는 키에 작은 얼굴, 오뚝한 코를 가진 화려한 인상이었다. 미남은 대학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데리러 온 아이 아빠들도 어쩜 그리 수려한지. 신체 비율이며 얼굴 생김새며 드라마 속에서 막 튀어나온 배우들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외모가 잘 생겼다, 예쁘다고 할 때 백인을 기준 삼는 경향이 있다. 큰 키, 긴 팔다리, 큰 눈과 높은 코, 작은 얼굴, 모두 서양인의 전형적인 특징 아닌가.


몇 해 전인가,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서 성형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수자타라는 과학 작가가 쓴 글에 따르면 최근 10여 년간 미국에 사는 백인, 유색인을 대상으로 각각 성형의 방향을 조사했더니, 백인들은 주로 코를 낮추는 수술을, 유색인은 코를 높이는 수술을 했단다. 가능한 한 백인의 모습에 닮고자 하는 열망이 반영된 결과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들어 이와 같은 백인 동경 성형수술이 서서히 퇴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백인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닌, 인종적 특징을 살리는 방향으로 성형하는 추세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미인을 이야기할 때 긴 다리와 쌍꺼풀 있는 큰 눈, 좁고 뾰족한 하관을 꼽는다.


임신을 하게 되면 아이에 대해 가장 궁금한 것은 아마도 첫째가 아이의 성별, 그다음은 생김새가 아닐까. 한 연예인은 임신했을 때 태교를 위해 잘생긴 배우 사진을 집 안 곳곳에 붙여놓았다고 한다. 덕분에 잘생긴 아이를 낳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 역시 셋째가 아들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아이의 외모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미국에서 10분에 한 번씩 마주치는 미남들처럼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임신 36주, 그날은 입체 초음파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배 속 아기는 거의 태아의 모습에 가까워졌을 터였다. 이 시기에는 초음파를 통해 아이의 얼굴, 움직임 등을 체크하고 머리 길이, 팔다리 길이 등을 살펴본다. 산처럼 부른 배를 내민 채 모니터 속 아기의 모습에 감동하고 있는데 유독 선생님이 특정 부위의 길이를 여러 번 재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 물었다.


“선생님, 아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잠시만요, 조금 더 볼게요.”


30분이면 끝날 거라던 검사 시간은 계속 지연됐다. 선생님은 아기의 다리 길이를 여러 번 반복해 쟀다. 자꾸 묻기도 뭐해, 이래저래 선생님 표정만 살피고 있는데 청천병력 같은 말씀이 떨어졌다.


“아기 다리 길이가 좀 짧네요. 결과는 주치의 선생님께 들으시면 됩니다.”


다리 길이가 짧다고?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다리 길이가 짧다는 게 무슨 뜻이지. 평균보다 조금 짧다면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정상 범위 밖이라면 심각해진다. 머릿속에 온갖 걱정이 뒤섞이고 침이 말랐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 이 또한 내 나이 탓인가, 더럭 겁이 났다. 몇 분 뒤 주치의 선생님이 입장했다.


“혹시 아빠의 키가 어떻게 되나요?”

“저와 비슷한데요.”


여자치고 큰 편인 나와 키가 비등한 남편은 평균보다 약간 작은 편이다. 남편의 키를 물어본 건 태아의 다리가 짧은 것이 유전적 영향인지 알아보려는 이유에서인 것 같았다.


“자, 이 그래프를 보세요. 아이 다리 길이는 비슷한 주수 태아의 정상 범주에서 가장 낮은 수치,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선생님은 그래프의 정상 범주 표시의 가장 낮은 곳을 펜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조금 애매하기는 한데, 어쨌거나 정상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정상이라는 말씀이죠? 아무 이상 없는 거죠?”


나는 걱정이 돼 되물었다.


“네, 아이는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불안해하는 내게 주치의 선생님은 웃으며 답했다. 아니, 정상이면 정상이지, 정상 범주에서 가장 낮다는 건 또 뭐람. 괜히 불안하게. 병원을 나서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기 다리가 짧다는데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 아이가 나를 닮아 다리가 짧은가 보네. 걱정 마, 정상 범주 안이라고 했다면서.”


이제 잘 낳는 일만 남았다 싶었는데, 입덧에 당뇨에 독감에, 이번에는 다리 길이까지. 이건 뭐, 임신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이 드라마틱, 그 자체였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는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됐다고 욕심이 불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생김새까지 바라고 있던 내가 한심했다. 며칠을 고민하며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남편이 나를 불렀다.


“보영아, 이리 와서 이 자료 좀 봐. 태아 평균 다리 길이가 인종별로 좀 다른 것 같아. 이거 봐.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평균이잖아.”


남편은 국내 산부인과 병원에 관련 자료를 요청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그도 내심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아이의 다리 길이 소동은 인종 간 평균 수치의 차이에서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덕분에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롱다리든 숏다리든, 얼굴이 크든 작든, 그것이 뭣이 중할까? 그저 무탈하게 사고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다.



이희준 교수's 산부인과 클리닉

대퇴골 길이

•셋째 아이 36주 대퇴골 길이 : 63.7mm
- 63.7mm는 미국 기준으로 33주 태아의 대퇴골 길이(Femur Lengt, FL) 평균에 해당
- 36주 미국 태아 기준으로는 하위 2%에 해당(100명 중에 하위 98등)
- 그러나 한국 태아는 평균에서 조금 짧은 길이로 하위 40% 해당(한국 35주 태아 FL 평균 64.5~65.0mm, 36주는 FL 평균이 66~68mm,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자료)

태아의 평균 대퇴골(넓적다리뼈, 허벅지뼈) 길이는 서양인과 동양인에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임신 초, 중반기까지는 차이가 없으나 임신 후반기부터 약간의 차이가 생깁니다. 임신 초기에서 후반기까지는 셋째 아이의 머리 둘레나 팔 길이, 다리 길이 등이 미국 태아의 평균 치수와 큰 차이가 없으나, 임신 후반기로 갈수록 유독 다리 길이만은 평균 밑으로 내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임신 19주 때, 셋째 아이와 미국 태아들을 비교해보면 53%의 길이였으나, 24주에는 42%로 내려가고, 30주에는 11%로 내려갑니다. 급기야 36주에는 하위 2%, 그러니까 100명의 미국 태아들과 함께 있다면 다리 길이가 98등으로 짧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국 태아들과 비교하면 하위 40%에 해당됩니다. 물론, 이 기준을 바탕으로 서양의 태아보다 동양의 태아, 특히 한국 태아의 다리 길이가 짧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FL이 짧다는 뜻이지 종아리뼈 길이까지 합친 총 다리 길이가 짧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신 후반기 특히 마지막 한 달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태어난 이후에는 성장 속도에 따라 또 다른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 일로 태아의 특정 부위가 특정 시기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잠시였지만, 막내에게 신체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노산이어도 괜찮아! _ 김보영, 이희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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