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났을 때 엄마 말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다리를 접질렸으면 어제 내가 집에 왔을 때 바로 말을 하지. 그 아픈 걸 어떻게 참았어.
절뚝거리며 움직이니 아프기도 할 거고, 하고 싶은 것 맘대로 못 하니 답답하기도 할 테고, 그런 엄마를 보며 나도 속상하지만, 한편 속으로는 '기회가 왔다'라고 생각했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예전에 지진 났던 해, 기억나? 나 집에 와서 지낼 때 말이야. 엄마가 자전거 타고 시장 다녀오다 넘어져 발목에 깁스했잖아. 당시엔 엄마가 음식을 하던 때였고 나는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도 해 본 적이 없고,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요일도 알지 못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막막했지. 무엇보다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때여서 그 상황이 너무 부담스럽고 짜증 났어.
그날 병원에 갈 때 차를 갖고 엄마 있는 데로 올 테니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그새를 못 참고 엄마가 차 있는 곳으로 절뚝거리며 왔잖아. 그 모습을 보는데 화가 나서 엄마가 차에 타자마자 내가 화냈던 거 기억나? 초가을이라 춥지도 않았고, 뼈에는 금이 간 상태였으니 그 자리에서 기다리면 더 좋을 텐데. 엄마는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러니 너는 병원 갔다 와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것 계속하면 된다'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기어코 차까지 걸어오셨지.
차 안에서 내가 화를 내자 엄마는 처음에 듣고만 있다가 낮아진 음성으로 알겠다고, 그만하라고 했지. 그런데도 그땐 진정이 잘 안 됐어. 그 상태로 병원에 도착해서 엄마한테 잠깐만 기다리면 1층 로비에서 환자용 휠체어를 갖고 오겠다고 하고는 갔어. 또 혼자 움직일까 봐 급하게 접수를 마치고 휠체어를 엘리베이터에 싣고 내려갔지. 문이 열리자 휠체어를 밀며 엄마를 찾았어. 그때 양팔을 뒤로해서 벽에 기대 엉거주춤 서 있던 엄마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입고 있었던 엄마의 옷과 파리했던 얼굴, 너무 작고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모습이 몽땅 한 덩어리가 되어 어른거리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속상한 마음으로 병원 일을 다 본 우린 어색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지.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고 TV를 보는데 갑자기 창이 흔들리며 큰 소리가 났고 얼마 후 지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아빠와 나는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집 앞 운동장으로 나가야 했어. 너무 무서웠고 그래서 정말 간절히 기도했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동안 아무 일 없게 해 달라고. 우리가 엄마를 그곳까지 옮길 수 있게만 해 달라고. 그렇게 무사히 운동장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 뒤로는 별일 없이 엄마도 잘 회복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지.
엄마, 우리 한 번씩 마트에 산책 삼아 걸어갈 때 있잖아. 걸음이 빠른 내가 앞서서 걷다가 뒤돌아서 걸어오는 엄마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어. (물론 다치면 안 되지만) 혹시 엄마가 또 다리를 다치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그날의 기억'들이 다 지워질 수 있게, 화도 안 내고, 먹고 싶은 것도, 해 달라는 것도 다 해 줄 거라고.
이번에 병원 갈 때 말이야. 한겨울에 웬 폭우가 그렇게 내리는지. 긴장해서 몸을 바짝 핸들에 붙이고 운전하는 나를 보며 혹시 엄마가 그날을 떠 올리진 않을까, 또 내가 화낼까 봐 불편하진 않을까, 괜히 쓸데없는 농담 하며 웃으니까 그제야 엄마도 하필 오늘따라 이렇게 비가 많이 오냐며 말을 하기 시작했지.
살아보니까 엄마 나는,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것보다 더 싫은 건 없는 것 같아. 특히 엄마 아빠한테 말이야. 병원 주차장에 엄마를 힘없이 서 있게 했던 날, 화가 났던 건 일 때문에 갈팡질팡했던 나 자신 때문이었는데 출구를 잘못 찾아 엄마한테 터트린 거니까, 정말 두고두고 후회되더라.
물론 그 뒤로도 여전히 엄마랑 다투고 또 금방 맛있는 거 만들어 먹으며 언제 그랬나 싶게 지내지만 '그날에 엄마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은 늘 저 밑바닥에 있었던 거 같아. 다행히 이번엔 그때만큼 심각하지 않아서 내가 한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엄마의 그 기억이 조금은 사라졌기를 바라.
조금 전 고구마 먹고 싶다며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엄마를 보니 얼마 전 먹었던 케이크를 또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내가 먹고 싶어 만들면서도 생크림 때문에 엄마가 "난 고구마 쪄서 그냥 먹을게" 하면 어쩌지? 했는데 맛있다고, 언제 또 만들 거냐고 했잖아. 이번엔 엄마 말대로 코코아가루 말고 계핏가루 넣고 만들어 줄게. 그리고 엄마, 앞으로는 다치지 말자, 응? (절대로, 제에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