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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Oct 05. 2023

초인 수업 (상)

코린토스의 왕 시지프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커다랗고 무거운 바위를 뾰족한 산꼭대기까지 올려놓아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를 뾰족한 산꼭대기에 세우는 순간 바위는 그 무게로 인해 다시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 바위를 다시 산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또다시 굴러 떨어지고,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시지프스는 무한 반복되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에 대한 이야기야. 신화는 신을 빌어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집단의 이야기라고 정의할 수 있어. 미국의 신화학자 조셉 켐벨 Joseph John Campbell은 “신화는 인류 최고(最古)의 철학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우주와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왔어. 신화는 우주의 창조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보편적이면서도 중요한 질문들을 신들의 이야기로 들려주지.


그 옛날 그리스인들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노동에 시달리는 인간의 삶을 빗대어 시지프스 신화를 만들었을 것이야. 알베르 카뮈의 저서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뮈는 이 세상은 부조리하지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신들은 시지프스가 포기하거나 자살하기를 바랐을 것이야. 그러나 시지프스는 자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신에게 끊임없이 반항하는 자유를 선택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오는 그 순간이야말로 시지프스가 자신과 운명을 이기는 승리의 순간이라고 말했어. 슬픔과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신들이 정해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산 밑으로 웃으면서 내려오는 인간 시지프스는 보란 듯이 그 바위를 다시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린다. 


카뮈가 무의미하고 지루하며 영원한 형벌을 묵묵히 수행하는 시지프스를 승리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부조리한 인생에 자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지. 무의미하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지만 그런 운명에 반항하고 현실에 충실하면서 삶의 부조리를 비웃는 시지프스. 그는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운명에 대한 반항이 진정한 인간을 만든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바로 ‘자기 극복’이다. 니체는 이런 시지프스 같은 사람을 ‘위버멘시 Übermensch’라 불렀어. ‘넘어’를 뜻하는 독일어 전치사 ‘위버(Über)’와 인간을 뜻하는 ‘멘시(Mensch)’의 합성어로서, 일반적으로 초인(超人)으로 번역되지만 뜻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내는 사람이다. 자신의 인생을 주인으로 사는 사람, 자신과 이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을 뜻하지.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많은 역경들을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야. 니체는 이 세계를 긍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위버멘시가 되라고 말한다.


1929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 태어난 빌 포터는 태어날 때 의사의 실수로 뇌성마비로 태어났다. 오른손을 못 쓰고, 등과 어깨가 굽었으며, 걷는 것도 불편했다. 심지어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상황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빌 포터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포터야 너는 할 수 있어" "인내심을 갖고 하면 뭐든 할 수 있단다" 빌 포터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빌은 포기하지 않았다.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끊임없이 구직을 시도했지만 그의 장애 때문에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빌은 자신을 이미 거절했던 생활용품 판매기업 왓킨스사를 다시 찾아가서 색다른 제안을 한다. "사람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장소를 저에게 주십시오" 


왓킨스사는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해서 그냥 일자리를 주게 된다. 기본급은 없고 판매 수당만 받는 외판원으로 취직한다. 빌은 포틀랜드 주택가를 매일 15km 이상 걸어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냉대와 멸시를 받았다. 장애인 취급, 거지 취급해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찾아갔고 이렇게 24년을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마을 주민들은 빌의 인내와 성실함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고 그에게 하나씩 물건을 구입했다. 인내의 화신 빌 포트는 1989년 올해의 판매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의 삶은 신문과 방송, 영화와 강연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생에서 멈춤이란 없습니다. 앞으로든 뒤로든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인생은 꿈을 가진 자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자가 성공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서 증명하였다. 그의 걸음은 비록 느렸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빌은 역경에 쓰러지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운명의 돌을 매일 성실하게 산 위로 올렸다. 니체가 그를 보았다면 이 시대의 진정한 위버멘시라고 불렀을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빌 포트는 니체의 잠언을 몸소 실천하였다.


니체의 잠언대로 역경을 딛고 이전보다 더 발전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심리적 외상 사건을 겪은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을 보면 고통이 항상 사람을 더 강하게만 만든다고 볼 수는 없다. 트라우마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사건보다 더 큰 천재지변, 또는 인재에 의한 큰 사고 등으로 인해 본인의 삶이 압도당하는 사건과 사고들을 말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으로는 자주 놀라고 악몽을 꾸는 등 사고 순간을 재경험하게 되고,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회피행동. 집중력저하, 수면장애를 겪고 우울 및 불안증상 등이 나타난다. 하지만 역경을 잘 극복하는 PTSD환자들도 있어. 외상 후 트라우마 반대말은 외상 후 성장이야. 역경을 겪은 뒤 성장하는 사람과 역경에 좌절하는 사람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회복 탄력성’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어. 어려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뜻하지. 물리학에서 탄력성은 외부 힘에 변형된 물체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힘을 뜻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역경을 극복하고 스트레스 이전의 적응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회복력이란 역경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인생관을 유지하는 능력을 뜻하지. 회복탄력성은 자신에게 닥친 역경을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힘이야. 성공은 평안한 상태가 아니라 역경을 극복해 낸 상태를 말해. 역사적인 위인들은 역경 ‘덕분에’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어. 대붕은 폭풍이 불어야 날 수 있다고 한다. 대붕에게 폭풍은 날기 위해 필요한 필수 조건이지.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자기 긍정성의 강화이다. 자기 긍정성을 강화하면 대인관계능력과 자기 조절능력을 높일 수 있어. 니체는 행복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어. 긍정은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야. 내 존재방식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안 좋은데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왜곡이자 기만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 Stockdale Paradox라는 용어가 있어. 비관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한편, 앞으로는 잘될 것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는 합리적인 낙관주의이지. 미국 해군 장교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어.


전투기 조종사였던 스톡데일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어.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격추되어 포로로 잡히게 된다. 하노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8년 동안 끔찍한 수용소 생활을 겪게 되었지.  1973년 베트남과의 평화 협정에 의해 마침내 그는 석방되었어. 인터뷰할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당신이 살아 돌아온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되, 현실을 낙관하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일찍 죽은 사람은 비관론자가 아니라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였다. 그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에는 석방될 수 있을 거라고 믿다가 크리스마스가 그냥 지나가면 부활절이 되기 전에는 석방될 거라고 믿었다. 부활절이 지나면 추수감사절 전에는 석방될 거라고 또 믿었다. 이런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지다가 좌절될 때마다 그들은 점차 희망을 잃어가며 죽어갔다. 스톡데일은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어. 그러면서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 포로들에게 조만간 석방될 거라는 희망에 매달리지 말고 우선 현실에 적응하라고 말했다고 해. 이러한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스톡데일은 동료 수감자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행위 수칙을 만들어 실행했다.

 

냉철한 현실인식과 뚜렷한 목표 달성의 의지가 동반된다는 점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비현실적이고 막연한 낙관주의와 구별된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회복탄력성의 증거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에서 나타나는 합리적인 낙관주의는 특히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동반하며 객관적인 현실을 인정하는 수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스톡데일이 보여준 강인한 생존의 의지는 의미 치료자 빅터 플랭클(Viktor E. Frankl)의 경험과 맥을 같이한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비참한 절망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미 추구를 잃지 않았고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어. 진짜 긍정은 내 삶의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야. 인간은 거대한 우연의 폭풍우에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폭풍우에 둘러싸인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은 불안이다. 불안은 두려움을 동반하지. 긍정은 우연을 인생의 의미로 바꾸어주는 에너지이다. 회복탄력성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불굴의 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두려움은 모든 부정적 감정의 근원이야. 불안을 공격성으로 투사하는 것을 분노라고 한다. 사실 분노는 두려움의 이면일 뿐이야. 뇌에서 감정과 관련되어 있는 정보들을 가장 많이 처리하는 뇌 부위가 ‘편도체’이다. 편도체의 역할은 위기 상황을 판단하고 그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몸을 대비시킨다. 이 대비 과정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를 뇌는 불안이나 두려움 등의 감정으로 해석한다.

 

화가 나면 이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화가 폭발하면 논리적인 뇌의 회로와의 균형이 깨지면서 편도체가 뇌의 회로를 점령한다. 심리학자 다니엘 골먼 Daniel Goleman은 이러한 현상을 ‘편도체 납치’라고 명명했어. 마치 테러리스트가 항공기를 납치하여 제멋대로 조종하듯이 편도체가 뇌를 분노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것이지. 뇌 안의 평화는 깨지고 편도체가 뇌를 지배한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쓰나미가 일어난다면 뇌가 편도체에게 점령당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현대인에게 닥치는 중요한 문제들을 전전두피질을 사용해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뇌는 위기라고 판단하고 편도체가 뇌를 지배하니 대응의 어려움이 생긴다. 감정은 마음이 아닌 몸의 문제인 것이야. 우리 몸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감정이다. 감정조절은 분노와 두려움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감정 조절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행위는 집착을 낳게 되고 집착은 편도체를 활성화시킨다. 모든 두려움은 집착에서 기인된다. 두려움은 회복탄력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야. 두려움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무의식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우리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변질시키고 결국 행동까지도 변질시킨다. 하지만 기회의 열매는 두려움이라는 씨앗 안에 숨어있는 법이지.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그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의 행동, 습관은 마음이 생각하는 것을 먹고 자라난다. 실패한 대한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회복탄력성이 높은 상태이다. 


두려움의 종류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은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좌절'과 이미 가진 것을 잃어버리는 '상실'이다. 이 두 가지 두려움의 공통점은 바로 ‘외부적 조건’이다. 진정한 행복은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발생된다. 돈이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벌수록 늘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권력이 행복이라 믿는 사람들은 권력을 얻을수록 자신은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외모를 숭배하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외모와 비교하며 자신은 매력이 부족하다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이처럼 외부적 조건은 오히려 불행의 조건이 된다.


옛날 인도에서는 원숭이를 사냥할 때 코코넛에 원숭이 손목만 한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바나나를 넣었다고 해. 그 코코넛을 나무에 묶어놓고 그다음 날에 그 자리에 돌아오면 코코넛 안에 손을 집어넣은 원숭이를 발견할 수 있다. 바나나를 움켜쥔 원숭이는 사냥꾼을 보고 도망가려고 주먹을 쥔 채 더 몸부림을 치지만 바나나를 끝내 놓지 못한 원숭이는 잡히게 된다. 


집착이 모든 두려움의 원인이다. 집착이라는 사슬을 끊어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수용은 집착의 사슬을 끊고 행복으로 인도한다. 그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야. 마음이 얽매이지 않아야 두려움이 생기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어. 집착을 버린다는 뜻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야. 소망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다는 뜻이지. 바나나를 원하되 때에 따라서는 바나나를 놓아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야.


불안을 근본적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인생은 양자역학적 사건 발생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우연들의 연속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지혜가 필요하다. 수용은 내 삶에 다가오는 그 어떠한 일도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나에게 다가온 일은 그저 나를 지나가도록 놓아두는 것이야. 어떤 일이든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역경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가 없어. 불행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저항하고 거부하는 나의 해석이라는 생각이니까. 생각을 통제하면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 생각을 통제하는 방법은 역경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보는 것이야. 진정한 승리는 일시적인 패배 너머에 있기 때문이니까.


불행한 사건을 수용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야. 수용은 오히려 벌어진 사건을 잘 처리할 수 있다. 수용은 불필요한 힘을 빼게 해 준다. 야구에서 투수는 어깨의 힘을 빼야 강속구를 던질 수 있어. 무하마드 알리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며 챔피언이 되었다. 스윙할 때 힘을 주는 프로 골프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내 인생이 벙커에 빠졌을 때 힘을 빼야 탈출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가 스트레스성으로 진단받는 많은 증상들은 자율신경의 부조화로 발생된다. 자율신경은 자동차로 비유하면 엑설레이터의 역할을 하는 교감신경과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는 부교감신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이 깨지면 각종 신경성 질환이 발생된다. 자율신경이 조화를 이루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신경이 알아서 내 몸을 가장 쾌적한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자율신경계는 우리 몸의 기능을 자율적으로 조절하는 신경계로 호르몬분비, 혈액순환, 호흡, 소화 등과 같은 여러 활동을 조절해 항상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기능은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율신경계의 활동을 인지하지 못해. 교감신경은 공포스럽거나 응급 상황일 때 우리가 빠르고 강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시켜 준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심장 박동수 증가되고 혈액 공급량이 증가한다. 기관지 이완으로 산소 공급이 원활해지고 눈의 동공 확대되며 혈당을 높이고 소화기능이 억제된다. 부교감신경은 스트레스가 없는 편안한 상황일 때 활성화 되는 신경이며, 신체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이용해 체내에 에너지를 최대한 보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부교감신경은 몸을 이완시켜 편안히 안정되도록 에너지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즉 긴장 상태에 있던 몸을 평상시 상태로 되돌려 준다. 부교감 신경이 활성화되면 혈압, 심박수, 호흡이 안정화되고 소화 활동 증가한다. 맛있는 음식을 볼 때 침이 고이고 사랑받는 느낌이 들 때 편안해지며 밥을 먹고 나면 졸리고 명상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 심신이 안정되는 것은 바로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기 때문이야.

 

내가 직접 혈압이나 맥박, 체온, 장운동을 조절할 수 없지만 유일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어. 바로 '호흡'이다. 자율신경의 불협화음을 해소하고 진정시키는 가장 빠르고 유용한 도구는 바로 호흡이야. 교감신경은 호흡을 얕고 빠르게 작동시키고 부교감 신경은 깊고 천천히 작동하게끔 한다.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은 항상 교감신경이 긴장되어 있어서 기본적으로 호흡이 얕고 빠른 경우가 많아. 그래서 교감신경이 폭주하는 순간 우리가 의식적으로 호흡을 천천히 깊게 하면 반대로 부교감신경의 작용을 활성화시켜 자율신경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지. 사람은 흥분을 하면 심장박동수가 증가한다. 심장을 직접적으로 천천히 뛰게 할 수는 없지만 호흡을 통해 심장박동수를 간접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 그러면 흥분된 편도체를 어느 정도 안정화할 수 있지. 이것은 우리가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심호흡을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번의 깊은 호흡만으로도 편도체에 변화가 생기며 우리의 감정 상태에 관여할 수 있어. 부정적 정서는 이처럼 호흡을 통해서 조절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운동이 몸을 단련하는 것이라면 호흡은 신경을 단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호흡이 조급해질 때가 마음이 불안할 때이다. 호흡은 납치된 나의 편도체를 구조할 수 있다.


명상의 정의에는 수십 가지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호흡을 통해 지금 여기에 실존함을 깨닫고 부정적 감정을 걷어내는 것이다. 명상은 뇌의 여러 부위가 활성화되면서 집중력을 높인다. 명상을 반복하면 신경가소성에 의해 자기 조절력이 점차 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에필로그 편에서 인간의 뇌는 스토리텔링 머신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의식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에 대해서는 내용이 길어지니 나중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마음이 과거에 집착하면 분노나 우울증이 발생한다. 마음이 미래를 향해 달려가면 불안이나 두려움이 나타난다. 과거나 미래는 자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구조이다. 나의 삶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재일 뿐이야. 행복은 마음이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명상은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떠돌지 않고 현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명상은 호흡으로 몸을 다스려 내 마음으로 가는 여행이다.


또한 명상은 나에게 닥친 우연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야. 진정한 행복은 그 우연들을 수용할 때에만 가능하지. 누적된 나의 순간들의 집합이 곧 나의 삶이다. 욕망을 소원하되 집착하지 않으면 인생은 여행이 될 수 있어.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야. 그래서 행복은 명사가 아닌 동사인 것이다.

 

아빠가 생각하는 초인은 마블 영화에서 등장하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세상은 부조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난 일에 대해 자책하지 않는 사람, 현실 기반의 합리적인 미래 예측을 하는 낙관성을 지니며 삶의 작은 일들에 감사해하는 사람, 회복력을 키우기 위해 내가 잘하는 것과 장점에 집중하고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며 꾸준히 자신에 대하여 성찰하며 내 인생의 가치체계 및 삶의 우선순위를 재설정할 수 있는 사람, 몸부터 움직이며 무엇이든 자꾸 시도하는 사람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삶은 운명의 중력에 의해 다시 관성을 얻을 수 있다. 아빠가 정의하는 초인이란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처럼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운명의 돌을 행복하게 나르는 사람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성취하는 것들의 근간에는 인간관계가 있어.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곧 나를 형성한다. 이 시대의 초인은 빨간 망토를 두른 자가 아니라 소통 능력이 뛰어난 자이다. 다음 편지에서는 소통 능력을 키워 이 시대의 초인이 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사랑하는 딸, 오늘도 우리에게 던져진 운명을 돌을 산 꼭대기로 올려보자. “의미 없는 짓을 왜 하나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직시하고 그러한 의미 없는 삶에 더욱더 충실할 때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가 생기는 법이다. 시지프스는 산 밑으로 내려올 때 고은의 시도 낭송했을 것이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그렇게 숨어있던 꽃들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삶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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