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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a Aug 13. 2023

삶이라는 행성을 박살내러 다가오는
거대한 멜랑콜리아

[멜랑콜리아] by 라스 폰 트리에

⚠️Warning : Spoiler



멜랑콜리아. 다른 말로는 ‘우울증’. 

이 ‘우울증’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 있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우울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다양한 사례를 보며 짐작을 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우울증에 대해 가장 잘 표현했다고 느끼는 작품은 팀 이건 감독의 호러 단편영화 <Curve>였다. 


잡을 것 하나 없이 매끄러운 절벽. 그 밑에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누군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절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한 여자.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공포에 허덕이고 비명을 지르며 느릿하게 그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 뿐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우울의 실체였다.


<Curve>가 충격적인 방식으로 우울의 실체에 대해 보여주었다면, <멜랑콜리아>는 우울을 이해시켜주는 작품이었다. 특히 강렬했던 것은 오프닝 시퀀스였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시작하는 이 오프닝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슬로우 모션을 사용하며 우리에게 앞으로 영화에서 일어날 일을 그저 느긋하게 보여준다. 그중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장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웨딩 드레스를 입은 채 덩굴에 잔뜩 얽매인 저스틴의 모습이었다.


온 몸에 덩굴을 휘감은 채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 발을 떼는 그 모습은 <Curve>에서 보았던 끝없는 어둠에의 잠식을 벗어나고자 하는 저스틴의 의지였고, 영화 속에서 자신을 우울하게 하는 ‘결혼’ 그 자체를 뒤로 한 채 도망치는 그녀의 두려움이었다.


<멜랑콜리아>는 아주 직관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우울이라는 감정을 단박에 이해시킨다. 바로 ‘종말’이다.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소행성의 이름이 ‘멜랑콜리아’라면, 그 우울증을 통해 종말을 맞게 되는 지구는 바로 우리의 삶을 나타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영화는 초반에 우울증을 앓는 저스틴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에서 조차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고, 도망치고, 힘겨워하는 저스틴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언니인 클레어 조차도 저스틴을 보살피고 사랑할 망정 이해는 하지 못한다.


하지만 ‘멜랑콜리아’가 가시화되어 눈 앞에 나타난 순간 저스틴과 클레어의 역할은 반전된다. 삶의 끝을 기다리며 클레어는 영화 초반 저스틴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저스틴은 의연하고, 차분하고, 평온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저스틴이 드디어 끝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스틴의 지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종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그 완전한 끝이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채로, 매 순간 극한의 공포 속에서 저만치 거대하게 존재하는 ‘멜랑콜리아’를 바라보면서. 그렇기에 저스틴에게 소행성의 등장은 오히려 그 모든 공포와 불안감에도 끝이 있음을 알려주는 ‘희망’이었던 셈이다. 이 무한한 우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 그것이 바로 저스틴이 초연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종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저스틴의 대사 한 마디가 잊혀지지 않는다. “The Earth is Evil. We don’t need to Pray for It.”

저스틴의 지구는, 살아 숨 쉬는 매 순간 공포와 무력으로 몰아넣는 지옥과도 다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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