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자유인 02화

신의 한 수

by 자유인

지난해의 연초에 갑자기 쓰러지고 한 달 뒤에 퇴원했을 때 나는 걸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거실에서 걷는 연습을 할 때 넘어지지 않도록 남편이 곁을 지켰다.

그리고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고는 아파트의 뒷마당으로 나가서 나무들을 보며 산책했다.

그때부터 그 나무들은 그냥 나무가 아니라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남편은 걷는 연습이 지루하고 슬픈 훈련이 아니라 데이트가 되도록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나를 태우고 다녔다.

송도와 해운대로 여러 수원지들과 사찰들로 그리고 전주와 제주도로.

제주의 다른 곳은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서 하루 종일 호텔의 예쁜 정원을 산책하고 힘들면 바로 객실로 올라가 쉬면서 책을 보았다.


남편이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출근을 하면서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컨디션의 난조로 곤란을 겪을까 걱정이 되어 아파트의 뒷마당만 걷다가 힘들면 집으로 올라와서 책을 보며 쉬었다.

친구나 지인들과의 모든 약속들도 집 근처로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마당의 나무들이 전지 작업으로 무지막지하게 가지치기를 당했다.

황량하게 잘려나간 나무들을 보며 더 이상은 뒷마당으로 나가기가 싫어졌다.

처음에는 분노했고 그 다음은 우울했다.

남편과 걷는 연습을 했던 장소들을 떠올렸다가

가장 가깝고 좋았던 곳으로 매일 차를 몰고 갔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숲의 아담한 오솔길을 반복해서 걸으며

천국은 이런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장소는 반복해서 방문하는 여행자에게만 그곳의 비밀스러운 매력을 보여준다고 표현한 류시화 작가의 통찰에 한번 더 감탄했다.

전지 작업이 아니었으면

계속 아파트의 뒷마당만 걸었을 것이다.

그 숲을 걸으며 감동할 때마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에세이의 제목이 떠오른다.

인생만사 새옹지마.

그토록 분노하고 우울했던 사건이 숲을 찾아가는 반전으로 이어져 스스로를 치유하고 성장을 위한 소중한 영감들을 얻는 비밀의 화원이 되어

내 인생의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신은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것 대신에

내게 꼭 필요한 인연들과 사건들을 보내주고 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다 좋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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