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쾌재 Apr 12. 2022

식초를 빌리다

위선에 대한 단상

                              사진=pixabay


종례를 하려고 교실로 향하는데 복도에서 학생 둘이 다투고 있었다. 일단 진정을 시키고 종례가 끝난 후 교무실로 불러 다투는 이유를 물었다. 한 아이가 대뜸 말한다. “선생님, 얘가 제 책을 빌려가서는 잃어버렸다고 안줘요.”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도 억울하다는 듯 “선생님 저는 얘한테 빌린 게 아니라 옆 반 제 친구한테 빌린거예요.”

   

상황은 이랬다. 깜빡 교과서를 놓고 온 녀석이 옆 반 친구에게 교과서를 빌리러 갔다. 친구 녀석이 교과서를 찾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조금 있다 가져다주겠다며 교과서를 빌리러 온 친구를 일단 돌려보냈다. 결국 교과서가 안 보이자 자신이 아는 또 다른 친구에게 교과서를 빌려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교과서를 빌려 간 녀석이 실수로 교과서를 잃어버리고는 돌려주질 않은 모양이다. 교과서의 원래 주인인 녀석이 자신에게 교과서를 빌려간 친구에게 갔더니 내가 아는 친구에게 빌려줬다며 그 친구에게 가서 달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교과서를 찾으러 왔는데 잃어버렸다고 하니 서로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사실 학교 안에서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한다. 특히나 이렇게 중간에 한 사람이 끼는 경우, 그 사람이 나 몰라라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자신이 어려운 일을 대신해 주는 냥 으스대며 나서다 문제가 생기면 쏙 빠져 나가 버리는 것이다. 다음 날 세 학생을 불러 서로의 문제를 짚어 주기로 하고 두 아이를 일단 돌려보냈다.

   

돌아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에 미생고라는 사람이 있었다. 미생고는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정직하기로 평판이 나 있었다. 하루는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식초를 빌려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미생고는 잠시만 기다리게 하고는 평소 식초를 담아두던 통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마침 식초가 똑 떨어진 것이다. 미생고는 식초를 빌리러 온 사람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옆집에 가서 식초를 빌려다 주었다.

   

미생고는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자신에게 없다고 무심히 돌려보내지 않았다. 언뜻 보면 남을 대신해 이웃에 가서 빌려다주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으니 참 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만도 하다. 그러나 미생고의 행위는 엄밀히 따지면 친절을 가장한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미생고의 행동을 다시 한 번 구성해 보자. 미생고는 누군가가 식초를 빌리러 오자 자신의 집에 없는 것을 확인했다. 없으면 그냥 없다라고 하면 될 것을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알려진 자신의 평판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자신의 체면이 서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미생고는 이웃으로 향한다.

   

미생고는 이웃에서 식초를 빌리면서 분명 자신이 필요해서 왔다고 했을 것이다. 이웃은 그렇게 알고 빌려 주었을 것이고, 그것을 받아든 미생고는 마치 자기 것인 양 다시 빌리러 온 사람에게 주었던 것이다. 미생고에게 식초를 빌린 사람은 호의에 감사하며 그의 친절을 칭찬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생고에게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얻어내 마치 자기 것인 양 건넨 것을 정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환심을 산 행위가 과연 친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지 이것은 남의 것으로 생색을 내서 자신의 인자함을 가장한 것뿐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했으니 자신의 양심도 속이고 다른 사람까지 속이는 꼴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베풂을 자신의 선을 위해 사용했으니 명백한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전 TV에서 방영된 어느 막장 드라마에는 성형으로 교통사고를 당한 언니와 얼굴을 바꾸고 살아가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모두 속인 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뒤로는 온갖 거짓을 꾸민다. 앞에서는 착한 딸과 며느리로 행세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위선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요즘 우리의 주변에서는 자신을 드러내고 누군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해야 할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으로 탈바꿈되는 경우들이 심심찮게 보여 진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다는 것이 어찌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겠는가? 미생고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일이다.


※미생고의 이야기는 《논어》 <공야장> 편 「子曰 孰謂微生高直 或乞醯焉 乞諸其隣而與之」(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미생고를 정직하다고 했는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식초를 빌리러 갔더니 이웃집에서 빌려다가 주었다.”)



작가의 이전글 문구사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