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안하는 근본적인 이유 고찰
첫째, 자기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이 열심히 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어서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사회 전체적으로 꽤나 큰 착각을 하나 하고 있는데, 바로 “노력하면 할 수 있다”이다. 전력을 다할 수 있는 분야는 개개인마다 어느 정도는 정해져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Fit theorist와 Develop theorist라는 개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새로 밝혀진 심리학적 개념인데, 본인의 성향과 기질에 딱 맞는 일을 찾아야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fit theorist), 어떤 일이든 일단 해보면서 적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develop theorist). fit theorist는 예를 들면, 야구 선수를 하다가 적성에 안맞으면 의사로 전향하는 사람이고, develop theorist는 야구 선수를 하다가 영 적성에 안맞으면 야구 코치로 전향한다고 한다. fit theorist는 아예 분야까지 바꿔버리는 반면, develop theorist는 진로를 바꿀 때,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고 한다. 본인이 어떤 일을 해도 열정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fit theorist가 아닐지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얻어가야 할 교훈은, fit이든, develop이든,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업무의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맥락이 본인과 잘 맞느냐, 잘 맞지 않느냐에 따라 일의 능률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유투브_ 지금 하는 일이 '천직'인지 헷갈릴 때 꼭 따져봐야 할 한 가지│김경일 교수)
나는 비행기 조종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관련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막상 비행 실습할 때가 되자, 나와 결이 안맞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노력이 부족한 줄 알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아무리 동기부여 해봤자 지속이 안됐다. 기계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내가 비행기 기계장치를 외우고 시험을 봐야 했다. 공중에서 고도 속도를 맞추고 있는 행위는 나에게 보람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비행기 속에서 나는 기계의 부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급변하는 상황에서 고도, 속도, 방향까지 맞추면서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감당이 안돼 공중에서 멘붕이 오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비행학교에서 짜주는 스케줄에 맞춰 사는 것도 힘들었다.
지금은 비행을 그만 두고 글을 쓰고 있는데, 글 읽고 쓸 때, 집중이 잘 되면서 몰입되는 느낌이 좋아서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이 당연해졌다. 재밌고, 하는 만큼 성과가 나오니 열심히 하는 게 기본값이 됐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생각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좋다. 외부 자극이 덜할수록 내가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행할 때는 다른 항공기, 관제탑, 교관과 계속 상호작용했어야했다.) 글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글쓰기 행위가 의미있게 느껴진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가 모두 나의 통제 하에 있는 느낌이 든다. 내 컨디션 주기에 따라 일상을 계획하는 것이 흥미롭다.
비행할 때 나는 문제학생이었다. 비가 와서 비행이 취소되기를 바라고, 비행을 펑크내고 집으로 도망가고, 못하겠다고 맨날 울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달라졌다. 나의 태도가 달라진 원인은 무엇일까? 덮어놓고 “노력”하지 않고 눈을 떠서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비행하면서 느꼈던 감정이 선택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비행할 때 난 비참했고, 글 쓰는 나는 짜릿하고 행복하다. 나는 비행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노력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스스로에 대해 한계를 두는 태도가 가장 위험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완전히 틀렸었다. 스스로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발전에 꼭 필요한 요소였고, 아무런 발전도 없으면서 “된다 된다” 공허하게 외치며 정신 승리 하는 게 훨씬 더 나쁘다.
나는 “노력”이라는 가치가 학교가 우리에게 전달한 가장 기만적 가치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다. 스스로가 어떤 과목을 배울지 선택하고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 공부에 흥미가 없다. 따라서 학교는 “노력”을 강조할 필요가 생겼다. 자신의 관심사와 흥미를 기반으로 선택하고, 본인이 원하는 만큼만 학습할 수 있다면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학습이 된다. 아이에게는 자기학습 능력이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통념과 달리 전혀 문제가 안된다. 오히려 흥미가 없다면 그만두는 것이 유리하다.(도서<언스쿨링>참고) 그래야만, 진짜 흥미있는 분야를 빨리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학습을 하면, “노력”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몇 배는 더 훌륭한 성과를 가져다주는 “몰입”이 우리에게 선물같이 찾아온다.
학교는 공장노동자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공장노동자는 글을 알아야 하고, 외국어, 수학, 과학도 잘 알아야한다. (업무 지시를 받았는데 글, 수학, 과학을 몰라 일을 못하면 공장의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좋아하지 않아도)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라는 가치를 우리에게 주입했다. 그 명제를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은, 의자에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수학 성적을 끌어올리는 데는 유리했을지 몰라도, 성공하는 데는 매우 불리해졌다. 당신은 “어떤 것이든” 일단 선택하고,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틀렸다. “성공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가 맞다. 과정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결과 중심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현재 행복하지 않고, 부유하지 않다면, 철저히 따져 봐라. 그 일이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지, 그 일에서 발전하고 싶은지, 그 일을 하면서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경험을 자주 하는지 판단해보라. 어떤 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 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오래 해야 한다. 재미도 없는데 10년, 20년 당신의 인생을 바쳐가면서 열심히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라. 사람마다 남들보다 잘 하는 게, 또는 남들보다 쉽게 하는 것이 하나씩은 있다. 자신이 뭘 잘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그동안 너무 자신을 가혹하게 다뤘거나, 경험부족 때문일 수 있기 때문에, 일단 푹 쉬고, 힘이 나면 지금까지 머릿속에 아른거렸던 활동들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무엇이든지 좋다. 잘 맞는 것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지도 모르나,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게 되면, 노력하지 않고도 노력이 되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법 첫째!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열심히 살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둘째, 당신과 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다른데도, 남을 모방하여 길을 찾으려고 한다.
성공하고 싶어서, 열심히 살고 싶어서, 성공한 이들을 보고 공통점을 뽑아내어 실천하기로 다짐했다면 잘 될까?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 노력에는 자기확신이 결여되어 있어 오래 지속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남에게 성공 비결을 배우고 따라하려는 당신! 지금 당장 남을 향한 시선을 거둬라. 당신에게 적합한 성공 전략은 당신만이 알 수 있다. 반면에, 당신이 다른 사람을 보고 성공하는 방법을 배우려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남을 따라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당신과 그 사람이 적어도 “비슷”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과연 당신 생각대로 사람들은 서로 비슷할까? 나도 얼마 전까진 사람은 누구나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얼마간 A를 원하면 전 세계 모든 인간도 A를 어느정도 원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MBTI 검사를 알게 되고, 사람들마다 원하는 게 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랐지만, 다음의 진화심리학 책을 읽고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람과 사람은 정말 너무너무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말이다.
진화심리학 책 한 권을 소개해야할 것 같다. 많이 들어본 책일텐데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다. 제2의 찰스 다윈이라는 평을 받는 이 책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에 의하면, 진화는 “종 전체”에 이익인 방향이 아니라, “개체(또는 유전자)”의 이익인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우리가 인간 전체에 이득을 주는 방향이 아니라, ‘내 자식만 많아지면 돼!’의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식이다. 종 전체의 이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부모는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가? 모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만, 어떤 부모는 아이를 버리기도 하며,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기껏 낳은 아이를 왜 죽이는 것일까? 종의 번영에 해가 되는 행동 아닐까?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런 현상은 개체(또는 유전자)의 이득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기본 원칙은 무조건 “내” 유전자를 많이 복제하면 복제할수록 이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 없이도 배우자 혹은 제3자가 아이를 잘 키울 것 같다면, 아이와 배우자를 버리고, 떠나 또 다른 짝을 찾아 아이를 낳고 싶은 욕망을 갖는 것이 “내” 유전자 복제에는 유리하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직접 낳은 자녀를 유기하고 살해하는 행위는, 암컷이 젊고 어릴수록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산모가 어리면 어릴수록 지금 한 명의 자녀를 낳아서 키워서 얻는 이득보다 장래에 더 많은 번식 기회를 잡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해 그렇다고 한다. 최종 목적은 내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는 것이다. 단, 이 때 전제는 “상대를 착취하더라도” 이다. 이 전제가 아주 중요하다.
유전자가 어떤 방식으로 번창하는 지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보자.
다음은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한 예시이다.
여기 암컷과 수컷이 있다.
-암컷: 영양이 풍부한 난자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체의 영양분을 새끼에게 공급하므로 아무 수컷하고나 짝짓기를 하기보다는, 질 좋은 수컷을 잘 골라 짝짓기 하는 것이 유리하다.
-수컷: 암컷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을 투자한다. 따라서, 수컷은 암컷의 신뢰를 얻기 위해 성실히 구애해야만 한다.
위의 진술에 기초하여 조신형 암컷과 성실형 수컷으로만 구성된 개체군을 가정해보자. 돌연변이가 생길만큼 충분한 세대가 지나고, 갑자기 집단 내에 아무 수컷하고나 짝짓기를 하는 경솔한 유전자를 가진 암컷이 등장했다고 해보자. 이 경솔형 암컷은 아무 수컷하고나 교미하고 번식하지만 개체 내에는 성실한 수컷들밖에 없으므로, 경솔형 암컷, 그리고 성실형 수컷에게 전부 이득이 된다. 왜냐하면, 암컷은 경계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고, 수컷은 구애할 시간자원을 절약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아낀 시간을 재생산에 재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신한 암컷이 고민하며 재는 동안 경솔형 암컷은 더 많은 새끼를 낳아 경솔한 암컷 유전자는 개체 내에 널리 퍼지게 된다.
또 다시 몇 세대가 지나고 이번엔 바람둥이 수컷 유전자가 등장한다. 경솔한 암컷 유전자가 널리 퍼진 상황에서 바람둥이 수컷이 등장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바람둥이 수컷이 개체 내를 휩쓸고 다닐 것이다. 바람둥이 수컷은 교미하고 양육에 대한 책임을 져버리고 또 다른 암컷을 찾아 떠나니 자신의 유전자를 끝없이 복제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이에 반해 경솔한 암컷은 수컷 없이 고된 육아를 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하여 바람둥이 수컷 유전자가 증가한 상황에서는 다시 꼼꼼하고 까다로운 조신형 암컷 유전자가 유리해진다. 바람둥이 수컷은 조신형 암컷의 마음의 문을 열만큼 오랜 시간 구애하지 못하므로 그들의 짝짓기는 성사되지 않기 때문에, 암컷은 수컷 없는 독박육아를 할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조신형 암컷의 마음을 열기에는 또 다시 성실형 수컷이 바람둥이 수컷보다 유리하다. 성실형 수컷 유전자가 증가한다.
.......(무한 반복)
이런 식으로 자연에서 생존 경쟁은, 서로의 특성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돌연변이가 생겨나고 또 그 돌연변이에 대응하는 성질이 생겨남으로써, 이들이 힘겨루기를 하면서 균형을 맞춰나간다. 도킨스에 의하면, (임의적으로 설정한 값으로 계산했을 때) 암컷의 5/6이 조신형, 수컷의 5/8이 성실형으로 된 개체가 진화적으로 안정하다고 한다. 혹은 개개인의 암컷이 5/6시간을 조신형, 나머지를 경솔형을 지내고, 개개인의 수컷이 5/8시간을 성실형, 나머지 시간을 바람둥이형으로 지내도 이 평형은 똑같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배우자를 놔두고 불륜, 바람피는 사례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그런 바람둥이들에게 낙인을 찍지만, 유전자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인다. 유전자 입장에서는 번식에 성공만 한다면, 한 사람만 바라보든, 이성에 쉽게 질려 여러 이성을 번갈아 만나든 상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바람둥이들을 욕하고, 박해하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문화 속에서의 “가치 판단 기준”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바람 피는 사람보다 바람 피지 않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기 때문에, 바람 피지 않는 사람(다수)의 입장에서는, 바람 피는 사람을 쓰레기로 몰아가는 것이 그들의 번식에 있어 유리한 전략이기에 (바람둥이들이 설치고 다니면 본인이 번식하기 불리하니까) 그런 가치관을 “만들어” 널리 퍼뜨린 것이 아닐까? 유전자는 선악판단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단지, 사람만 선악판단을 할 뿐이다. 정말 그렇다면, (여자든 남자든)타고난 바람둥이에게는 꽤나 억울한 상황일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같은 인간이라고 비슷한 성질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사회에 버젓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들 입장에서는 정상인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다. 성공 비결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따라하고 싶은 그 동료, 그 기업인과 당신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며, 서로 가지고 있는 자원, 장단점, 기질, 가치관 등이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 내내 일해도 체력이 버텨주는 반면, 누군가는 쉽게 지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사교성이 좋아 그 사교성을 사업에 이용할 수 있지만, 수줍은 사람이 사교성을 활용한 사업을 한다면 잘될 수 있을까? 따라서 성공 확률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전략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에게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결과는 좋은 방식은 무엇인지 찾는 것이다. 당신이 편안하게 잘 할 수 있는 방식 말이다. 그래야 오래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맞는 전략을 직접 찾는 것이 남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따라하는 것보다 훨씬 쉬우며, 성공 확률도 극적으로 올려준다. 아무리 남을 따라하려고 해도, 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모든 의사결정 과정을 지켜보고 배울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구와 호불호에만 집중하는 것은 쉽다. 그리고, 당신이 남의 말을 듣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스스로 고민하고 논박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확신은, 남을 따라해서 얻는 확신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단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실패해도 계속 도전해야 한다. 그런데, 남의 말을 듣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나? 네 다섯 번만 해도, ‘아 이거 너가 된다고 해서 했는데 안되잖아.’ 하며 남에게 책임을 묻고,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스스로 결정해서 도전하는 사람은, 그 일에 확신을 가진 이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정도이다.
지금까지 남에게 길을 물어왔다면, 지금부터 “나의 길”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