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살이 14년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 때는 '미국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렸더랬다. 바야흐로 십 몇년전, 미국 매릴랜드의 로컬 사립대학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나는 매일 같이 생각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지. 그 곳에서 유학도 하고 더 나은 나를 찾을거야." 이 미국병이 얼마나 증세가 심했던지,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지 3년 만에 남은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치고 바로 박사 유학길에 올랐다. 어릴 적부터 시골을 전전하했던 촌뜨기 한국 토종인 나는, 버벅대는 영어로 미국 살이를 시작했다. 10여년 후 지금, 미국에 적응하기 위해 좋던 싫던 인정해야만 했던 문화차이들이 있다.
1. 자기 주장이 중요하다.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한국에서 나는 질문하고 토론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성격상 질문은 항상 많은 편이었지만, 선생님의 권위에 눌려, 혹은 같이 수업을 듣는 주변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자유롭게 질문하고 내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미국 대학원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는 미국학생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은 조리있게 자세하고도 길게 설명한다는 점이었다. 설사 그 주장이 맞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 했다. 25년간 한국 문화에만 젖어있던 나는 "아 놔 얘들 정말 말 많네." 라고 그들을 생각하곤 했다. 지금에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말로 내 뱉지 않으면 아무도 알지 못하며, 여러 예를 들면서 반복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다른 이들은 기억을 못한다. 이제는 "어느 분야든 자기 주장을 조리있게 표현하고 잘 소통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라고 뼛 속 깊이 생각한다.
박사 시절 미국인 지도교수님께 들은 한 마디가 나를 바꾸게도 하였다. 문제를 숨기지 말고 말해라. "너말고 다른 한국인 박사학생도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던데, 그거 한국 문화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좋은게 좋은 거고, 조그만한 일들을 그냥 넘어가려 했었다. 그런데 60대의 노련한 노교수인 그는, 넘어가지 말고 주장하고 해결하라 했다. 그때부터였는지, 언제부터 였는지, 나는 수동적인 삶을 버리고 설사 항상 맞지 않을지라도, 가끔 내 얼굴이 부끄러워질 지라도 적극적으로 내 주장을 펼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지금 일하는 곳에서 나는, 내 주장을 가감없이 펼치고, 내 연구 결과가 최대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여기 저기 어필하는 것이 일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다가오는 평가 시즌에는 승진을 하겠다고 매니져에게 미리 얘기해두었다. 내가 작년 한 해 열심히 연구해서 여러 중요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조직에 필요한 인재가 되었으니,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기다리는 겸손의 자세 말고, 나는 내가 잘한 건 잘했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알리는 삶을 살기로 했다.
2. 어디에서든 다양성과 개인의 차이는 인정해주어야 한다.
한국에서 비빔밥을 시킨다고 생각해보자. 비빔밥은 그냥 비빔밥일 뿐이다. 왠만한 한국 사람들은 비빔밥에 들어갈 재료를 묻고 따지지 않는다. 주방장이 요리하는 대로 그대로 먹을 뿐이다. 만약에, 비빔밥이 미국음식이었다면 반드시 개인취향을 고려한 메뉴였을테다. 밥은 어느 종류로 할건지, 무엇을 넣을 건지, 어느 양념을 택할 건지, 모두 소비자가 고르고, 따라서 한 메뉴가 아니라 몇 백가지의 다른 가능성이 있을 메뉴였을거다. 실제로 일부 메뉴가 단일화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제외하고는, 미국 식당들은 항상 커스터마이즈 가능한 메뉴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 한국에 진출한 Five Guys를 보아라. 하나부터 열까지 골라야한다. 나는 이런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존중하지만, 메뉴를 골라야한다는 면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안그래도 결정할 게 많은데, 먹을 때까지 결정을 해야하나. 그냥 음식 만드는 사람이 주는대로 먹고싶다.
그렇지만 다양성을 직장생활에 가지고 오면 내 안일한 생각이 달라진다. 지금 직장을 시작할 때 받았던 교육 중 하나는 Divrsity, Inclusion, & Belonging (DI & B)이었는데, 이것이 내가 지금 직장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여기서 다양성이라 함은 모든 영역에 해당될 수 있는데, 그게 인종, 출신, 경험, 성적취향 등등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회사들이 (표면적으로 나마) 다양성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직장 문화에서, 나는 더 안전하다고 느끼고, 편안하게 내 직무를 펼칠 수 있다. 실제로 다양성이 그리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내 첫 직장의 리더쉽 구성을 보면 그야말로 백인 남자 (White Men)들이 수두룩 빽빽 이었다. 설사 연봉을 더 받고 높은 직위로 스카웃 된다하더라고 그 직장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한국에서 인턴 생활 외에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을 해보지 않았으니 다양성 존중의 직장 문화를 제대로 비교 불가 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다양성이 떨어지는 한국의 인구 구성상, 내가 만약 한국으로 돌아가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면, 이 다양성이 아쉽지 않을까.
3.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거리는 지켜야한다.
처음 미국에 건너 갔을 때, 이민생활 40여년을 하고 있는 이모랑 장을 보러 갔다. 1시간도 안되는 그 짧은 기간동안 이모가 나를 몇 번이나 멈추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막 넘어 온 나는 물리적 거리를 지키는 법이 없었다. 미국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상당히 중요시 하는데,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Excuse me"라고 말하며 거리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몸짓을 보인다. 강남역에서 여러 사람과 어깨가 부딪혀도 서로 쳐다보지도 사과도 않고 지나쳤던 나로서는 배워야 했던 문화다. 이제는, 부모님이 한국에서 가끔 오실때면 예전에 이모가 그러했듯이 자꾸만 잡아서는 나를 발견한다. 코스트코에서 박스를 가지러 갔던 엄마가 아무 생각없이 앞 사람을 제치고 박스를 가져왔을 때, 나는 엄마 곁에 있던 미국인이 엄마를 쳐다보던 경멸하는 눈빛을 기억한다. 그로써는, 아무런 말 없이 본인의 물리적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아시안 여성이 불쾌하고 이해가 안됐을거다.
거리라는 것이 물리적인 것 뿐만아니라 심리적인 것도 해당된다. 미국에서든 그 누구도 나에게 초면에 몇살이냐고 묻거나, 아이는 더 낳아야 하는지 아닌지 묻지도 않는 조언을 하지 않는다. 좀 친하다 싶어 내 입장을 대신해 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법도 없다. 직장에선 내 상사라 해서 이래라 저래라 일을 시키는 법도 없다. 내가 주도해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피드백을 전달할 때는 내 의견을 항상 묻는다. 자기 주장은 해야하지만 선을 넘는 무례한 언사나 행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가끔 한국의 그 정많은 오지랖이 그립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한살이라고 많으면 대접받고 조언하는 그 입장이 어떨까, 가끔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좁혀질 수 없는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 수 있는 건 아마도 한국인들과 미국인들의 공통점이 더 많아서 일거다. 나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도 정이 있고, 열심을 존중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그런 인류 보편의 가치가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도, 좋은 일 안 좋은 일 겪으면서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