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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글 Oct 12. 2022

두 번째 세계

유실물이 된 심정으로 가만히 누워만 있는 날이 늘어갔다

© 최동글


4년 전, 첫 독립을 무턱대고 타국에서 시작했다. 일 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들고, 짐은 28인치 캐리어 하나에 욱여넣고서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스물네 살 때의 일이다. 딱히 일본에서 살겠다는 목표가 있던 건 아니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하기 싫은 일을 피해 가다 우연히 발부리에 치인 돌을 집어 든 셈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모든 건 계획된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무소속의 감각이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버겁게만 느껴졌다. 0부터 100까지 오직 내 의지만을 원료 삼아 굴러가고 쌓여가는 하루하루가 숨 막혔다. 누군가 시간표를 짜주고, 이왕이면 출석까지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선 안 된다는 불안과 결국 헛되이 보냈다는 실망이 교차하는 와중에도 해는 뜨고 지길 반복했다. 취업 준비는 남들 하는 만큼 다 해놓고도 막상 한 발짝을 내딛지 못했다. 주류에서 동떨어진 것 같아 애가 탔지만 정작 무리에 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망설였다. 이렇게 시작해버려도 되는 걸까? 간절히 입사하고 싶다던 ‘귀사’에 정말 가고 싶긴 한 건지, 역량을 발휘하고 싶다던 그 ‘직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맞긴 한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왠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늦된 자기 탐구의 시간을 대부분 침대 위에서 보냈다. 유실물이 된 심정으로 가만히 누워만 있는 날이 늘어갔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초여름이었다. 정류장에 붙여진 홍보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수원시 일본 취업 지원 프로그램 참가자 모집"

그 아래에 적힌 프로그램 일정.

"~12/31일까지"

솔깃했다. 이것 하나면 올해는 어떻게 해서든 나겠구나, 싶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충동적으로 신청서를 작성했고,  길로 6개월간 집과 학원만을 오가며 일본어 공부에 전념했다. 수업은 하루 여덟 시간 안팎. 사람을 움직이는   대단한 계기가 필요한  아니었다. 그때 내게는 소속감이랄지 명목이랄지 그런 공갈빵 같은 것들이 간절했을 뿐이었다.


내가 본 공고는 추가 모집이었던 터라 기존 참가자들보다 한 달 늦게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되었다. 한 달 사이 그들은 이미 초급 교재 한 권을 끝낸 참이었고 나는 히라가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문법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자력으로 한 달치 진도를 메꾸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도 새벽까지 공부했다. 단순히 뒤처지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는데, 그런 식의 열등감은 때때로 내 안의 괴력을 끌어올려 주곤 했다.


모르는 게 생기면 언제든 전화해도 좋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밤마다 전화했다. 수업 중에도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바로 손을 들고 물어봤다. “질문 있는 사람?”을 스타트 신호 삼아 침묵의 공공칠빵을 즐겨하던 내가 고요함을 가르고 목소리는 내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일본어는 재밌었다. 특히 한국어와 어순이 같아, 단어와 그 활용법만 제대로 알면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일본어에는 영어를 배우면서는 느낄 수 없던 짜릿함이 있었고, 그건 그 자체로 강력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며칠 굶은 기세로 공부를 했다. 해치워 먹었다.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다가 양초는 일본어로 뭘까 궁금해 찾아보면 다음 날 교재 어딘가에 그 단어가 실려 있곤 했다. 그런 순간들이 나를 홀렸다. 초여름부터 함박눈을 맞을 때까지 너덜너덜해진 단어장과 몇 권의 노트가 내 세계의 전부였다. 그곳에서는 존재하기 위해 더욱 정성을 기울여야 했다. 단어를 고르는 일에 공을 들였고 아무도 무심하게 말을 뱉지 않았다. 그런 조심스러움이 고맙게 느껴지는 시기였다.


이런 식의 공부라면 평생 책에 코 박고 살아도 괜찮을 듯했다. 대학원에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를마뉴 대제가 한 말을 책에서 읽었다. 다른 언어를 갖게 되는 건 두 번째 영혼을 획득하게 되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일본어가 재밌고, 일본어 공부만 하고도 평생을 살 수 있겠다 말하는 나는 두 번째 ‘나’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반년만에 두 번째 세계가 열렸다.


반면 간과한 것이 있다면 해당 프로그램의 목적이 어학 공부가 아닌 취업이라는 점이었고, 그 점에서 나를 포함한 참가자 전원이 실패했다. 우리는 서류 심사에서부터 탈락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떨어졌지만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착실히 쌓아올린 노력은 비록 탈락 감이었을지라도 촘촘하고 견고했으므로, 그 앞에 서면 움츠러들 것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주저 없이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도깨비 같은 정신력이었다. 그것은 말을 깨치고, 고유한 말투가 생기고, 좋아하는 단어를 줄줄 읊을 수 있을 만큼 한 세계에서 다른 한 세계로 스며든 사람이 뿜어내는 강기(剛氣)였다.


그래서 도깨비 같은 정신력으로 무엇을 했느냐, 하면, 도망을 쳤다.



© 최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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