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도 괜찮지 않나요?
“도망쳐도 괜찮지 않나요?”
요코하마를 배경으로 한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각자의 사정으로 계약 결혼을 맺은 두 주인공은, 가사 노동을 대가로 매달 급여를 주고받는 고용 관계이다. 하지만 필요한 경우 ‘시간 외 근무’에 해당하는 부부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하는데, 그날도 양가 상견례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츠자키 히라마사가 ‘부모님을 안심시켰다는 점에서도 이 결혼은 의의가 있다’고 말을 꺼내자 여자 주인공 모리야마 미쿠리는 크게 안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라마사 씨가 후회할까 봐 무서웠어요. 결국 주위를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까 평범한 결혼인 척 연기하는 것도, 도망이라면 도망인 거잖아요.”
그러자 히라마사는 되묻는다.
“도망쳐도 괜찮지 않나요? 헝가리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소극적인 선택이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부끄러운 모습이라도 살아남는 편이 중요하고 그 점에 있어서는 어떤 이론도 반론도 인정할 수 없어요.”
요코하마의 야경을 등지고 선 미쿠리는 나지막이 되뇐다. 도망쳐도 괜찮다.
어떤 갈림길에 다다를 때마다 그곳에 ‘도망’이란 선택지는 없었다. 망설여지는 순간에는 앞사람이 가는 대로 따라갔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제 몫을 다할 때면 어느 정도 성취와 보람도 느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선택해 나아갈 순간을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작은 선택에도 책임이 따르는 만큼 선택을 미루는 일에도 ‘뒤쳐진다’는 부담이 뒤따랐다. 그 ‘때’에 맞춰 어제 했던 노력을 오늘 또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나였다. 가치 있게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나. 무용한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나. 그런 나는 ‘아직’이란 말 앞에 크게 좌절했다.
“도망쳐도 괜찮다.” 되뇌는 미쿠리의 얼굴이 밤낮없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자 새로운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수께끼 같은 미래와 막연한 불안을 상자 속에 몰아넣고 그 위에 ‘보류’라고 적었다. 그동안의 선택 중 가장 무책임하고 허무맹랑해 보였지만 딱히 겁나지는 않았다. 그 상자를 침대 밑에 숨겨두고 도망쳤다. 자기소개서와 친구들의 취업 성공 후일담, 기대하는 눈빛들로부터. 아리송한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일에 때가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다만 그 때를 정하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 했다. 유실물은 무사히 주인에게 돌아갔다.
“나도 요코하마로 가겠어.”
그렇게 부끄럽지도 않은 듯 엄마 아빠의 시간과 돈을 훔쳐 달아났다.
“아 진짜, 다녀와서는 취업한다니까.” 이 말만을 남기고 두 번째 세계를 향해 도망쳤다. 그 도시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을 미쿠리를 떠올리면 이상한 힘이 났다. 아마도 살아남는 힘일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