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형의 탈을 쓴 명령문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내 말투에 대해 남편에게 '지적'을 받은 일이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결혼했던 나의 신혼집은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그날도 술과 안주거리를 사기 위해 내 친구와 나 그리고 남편, 이렇게 셋이 마트에 장을 보러 갔었다. 들고 있는 짐이 있어서 마트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짐을 맡기고 들어갔고, 쇼핑을 마친 뒤 계산하기 위에 줄을 서있을 때였다.
나: "여보~ 내가 여기서 계산을 하고, 여보는 맡겨놓은 짐을 찾아올 거예요?"
남편: "저 말은 질문이 아니야. 맡겨놓은 짐을 찾아오라는 거지~"
남편은 나에게 대답하는 대신, 내 친구를 향해서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짐을 찾으러 갔다.
나는 남편이 한 말의 의미를 명확히 모르겠어서 마음이 찜찜하고 불안했다.
내 말투가 불만이라는 건가? 질문하듯이 시켜서? 그렇다면 왜 그동안 나에게 한 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던 나는 급기야 예전 카톡을 다 뒤져보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남편이 했던 말의 의미를 금방 알게 되었다.
"여보~ 나 대신 여기로 계좌 이체해줄 수 있어요?"
"여보, 오늘 쓰레기 버려줄 거예요?"
"우리 이번 주말에 꽃시장 가나요?"
정말로 그랬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과 상대방이 해줬으면 하는 것을 질문형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나의 말투를 깨닫고는 남편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때 당신의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고민이 되었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질문을 하며 많이 시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질문은 곧 명령이 아니니 편하게 거절을 해도 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쳐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 친구에게 나의 친절한 말투를 자랑한 것이라고 했다.
명령조로 말하지 않고 질문형으로 부드럽게 말하는 나의 말투가 좋고, 그래서 뭐든 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나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의 말투를 좋아해 주고 있었다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집에는 다양한 질문형 명령이 끊이지 않는다.
나의 말투가 어디서 왔는가 하면 101% 엄마다.
말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추임새와 표정, 리액션까지도 놀랍도록 닮은 구석이 있다.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말씀을 참 예쁘게 하신다. 말도 철, 시멘트, 나무, 흙과 같은 재료로 빚는 것이라면, 엄마 말의 재료는 바닐라 익스트랙을 듬뿍 넣은 빵 반죽일 것 같다. 달큼한 향이 나고 말랑말랑 보드라우며 나중에 구워졌을 땐 더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결혼하고 양가 부모님께 귀여운 액수의 용돈을 열심히 챙겨드리던 시절, 남편이 장모님 봉투에 사랑스러운 말을 적어 드렸다. 하지만 스스로 글씨체에 자신이 없었는지 '악필 사위 올림'으로 마무리를 했다. 사실 나도 가끔 한번에 읽지 못하는 남편의 글씨가 있다.
엄마는 그런 사위의 글씨를 보고는 '달필'이라고 말해주셨다.
"원 서방, 달필이네~"
"달필이 뭔데요?"
"명필 다음이지. 보니까 명필까지는 아닌 것 같고, 그다음인 달필이야."
달필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능숙하게 잘 쓰는 글씨 또는 그런 글씨를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 첫 번째이고, '장래에 귀하게 될 기상이 있는 글씨'가 두 번째 뜻으로 나와있다.
음.. 엄마는 아무래도 사위의 글씨에서 장래에 귀하게 될 기상을 보셨나 보다.
선생님들은 기본적으로 질문을 많이 한다. 질문인 것 같지만 제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명령인가 싶은 그런 질문 말이다.
"누가 한번 해볼까?"
"철수가 한 번 발표해보겠니?"
"우리 다 같이 교과서 30페이지를 펴볼까?"
나는 집에서도 이런 종류의 말을 주로 듣고 자랐다.
"이제 양치할까?"라는 엄마의 말씀에 양치를 했고, "이제 그만 잘까?"라는 물음에 자야겠구나 생각했다.
우리 집에서는 오히려 "양치해라. 방 치워라."가 듣기 힘든 말이었다.
나는 종종 남편에게 '내가 언제 처음 좋았어요?'와 같은 진부한 질문을 하곤 하는데 남편은 다섯 가지 정도의 대답을 가지고 돌려 막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랑 언제 처음 결혼하고 싶다고 느꼈냐는 질문에는 항상 같은 이야기를 한다.
"가족들이랑 전화 통화할 때 친절한 말투를 듣고 그런 마음이 들었어.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와 통화할 때도 항상 조곤조곤 예쁘게 말하는 걸 보고,
나도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존재가 될 텐데 그때 나에게도 이렇게 상냥하게 말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남편의 예상이 영 틀리지는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도 내 말투는 친절한 편이니까.
가끔은 콜센터에 전화해서 문의할 때나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도 상담원이나 직원보다 내가 훨씬 친절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여전히 존댓말을 쓴다. 15년 전 대학교에서 선후배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다. 주변에서 내가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걸 알게 되면 두 가지 질문을 제일 많이 한다.
남편과 나이차이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남편도 나에게 존댓말을 쓰는지. 대답은 ‘4살 차이이며, 남편은 나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이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 상대방은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볼 때처럼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한다.
사실 존댓말은 말 끝에 ‘요’만 붙이면 완성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지금 장난해요?’, ‘진짜 멍청하네요.’도 존댓말이다. 나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하고, 남편은 나에게 반말을 하지만 그의 말이 훨씬 더 따뜻하고 사려 깊다고 인정한다. 존댓말이 아님에도 상대방에게 이렇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는 쉽지 않다. 특히 오래된 관계일수록 말이다. 그런데 내 남편이 그 어려운 걸 해내고 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말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다고 여겨지거나 존댓말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요즘은 오히려 나의 '친절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내용'이 고민이다. 성격은 하고 싶은 말은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타고났으나, 듣고 자라온 환경이 나를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의 사람으로 길러냈다. 그래서 참 아이러니한 캐릭터가 되었다.
상냥한 말투만큼 더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