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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레리나 Aug 23. 2022

매일 벤츠를 타고 출퇴근하는 신입사원

라이딩과 사랑이 비례한다면

아빠는 항상 나의 기사 노릇을 자처했던 분이다. 걸어 다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면 되는 곳도 아빠의 차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참 많다. 그만큼 아빠와 함께한 추억은 많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보답을 해야 할 때인데 운전을 못해서 여전히 아빠 차에 무임승차하는 게 죄송할 따름이다.



아빠표 라이딩의 단편들


중학생 때 나는 열렬한 팬질을 했다.

지금은 한국에 입국할 수 없는 그 가수의 마지막 팬클럽 창단식이 있던 날. 지하철을 타고 가도 된다는 나를 아빠는 굳이 차로 태워다 주셨다. 그리고는 마주한 광경에 적잖이 놀라셨다. 주말 이른 아침부터 펜싱경기장 앞에 수많은 여자들이 빨간 풍선을 들고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딸 또래 아이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다 큰 성인들도 많더라'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하신다. 아마 덕질의 현장에 직접 가본 아빠는 정말 드물 것이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내 의지로 굳이 멀리에 있는 학교에 지원해서 갔다.

하지만 입학한 지 몇 달만에 새벽에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하고, 11시에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뒤 다시 스쿨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자정이 넘는 생활에 지쳐갔다. 나는 결국 학교 근처 아파트에서 친구와 둘이 자취를 하기 시작했고,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아빠가 항상 데리러 오셨다. 아빠가 오면 ‘오늘은 뭘 먹을까?’하며 낯선 동네 낯선 식당에서 단 둘이 점심을 먹었던 토요일 데이트가 참 좋았다.

주말을 본가에서 보내고 자취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역시 아빠가 바래다주셨는데 처음에는 일요일 초저녁에 데려다주시다가 그 시간이 점점 일요일 늦은 밤으로 바뀌었다. 결국엔 하루라도 더 자고 가라며 바쁜 월요일 아침에 나를 태워다 주고 나서 출근을 하시곤 했다. 고단했던 학창 시절이었지만 아빠가 내 고단함을 덜어주었고, 단둘이 함께한 추억은 더 많아졌다.


집에서 가까운 고등학교로 전학 온 뒤로는 등하굣길이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했다.

그래도 아빠는 시간이 맞으면 항상 차로 등교를 시켜주시곤 했는데, 그 시간에 아빠 차에서는 항상 ‘손석희의 시선집중’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 손석희님이 jtbc 뉴스를 진행할 때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교복을 입고 아빠 차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침이 생각나곤 했다.




드림콘서트


내가 어린 시절에도 드림콘서트는 그 시기에 유명한 가수들이 총출동하는 콘서트였다. 티켓은 무료였지만 주유소에서 1인당 2장씩 나눠줬기 때문에 티켓을 배부하는 시기에는 십 대 여학생들이 주유소에 줄을 서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당시에 나는 매우 드문 확률로 친한 친구들 중 두 명이나 주유소집 딸이었고, 덕분에 드림콘서트 티켓은 항상 줄도 서지 않고 쉽게 구했다.

친구를 잘 둔 덕에 티켓이 넉넉해서 여기저기 나눠주기도 했다. 아빠 친구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가면서 알게 된 언니(아빠 친구의 딸)가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언니에게도 티켓 여러 장을 보내줬다.


그 해 드림콘서트는 11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났고, 잠실 경기장에서부터 우르르 몰려가 지하철을 탔지만 어렵게 갈아탄 막차는 구로행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 근처 지하철역에 세 정거장 못 미쳐서 내려야 했다.

아빠는 구로역에 있다는 나의 전화를 받고 급히 데리러 오셨는데 거기에는 딸과 딸의 친구들, 그리고 딸이 오지랖을 부려 티켓을 준 친구의 딸과 그의 친구들까지 있었다. 아빠는 나와 내 친구들을 집에 내려다 주시고는 인천에 사는 아빠 친구의 딸까지 모두 귀가시킨 뒤 새벽 두 시가 넘어 돌아오셨다.


아빠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혀를 차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어린 학생들이 가는 콘서트면 지하철 끊기기 전에 마치고 집에 돌려보내야지.." 

그 핀잔의 대상은 딸이 아닌 콘서트 주최 측이다.


아빠는 내가 콘서트에 갔다는 것, 그리고 지하철이 끊길 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었다. 그저 콘서트가 너무 늦게 끝난 것이 잘못이다.

덕분에 드림콘서트는 소녀팬 시절의 즐거운 기억이고, 막막한 순간에 지구용사처럼 나타난 아빠와의 따뜻한 추억일 뿐이다.


2002년 드림콘서트 응원석. 나도 어딘가에 있겠지?




기사가 출퇴근시켜주는 신입사원


스물다섯 살, 첫 직장에 입사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발등이 부러져 깁스를 하게 되었다.

한 달간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해서 지하철 출퇴근은 도저히 어려웠다. 역시 아빠가 매일 출퇴근을 시켜주셨는데 이전까지는 프리랜서 운전기사였다면, 이때부터는 대기업 회장님을 모시는 정규직 기사가 되었다.(아빠 죄송해요..ㅠㅠ) 매일 아침 일찍 나를 직장에 태워다 준 뒤 출근을 하셨고, 퇴근을 하고는 다시 내 직장으로 태우러 오셨다.


출근길에는 파리바게트가 있었다. 아빠는 매일 빵집 앞에 잠시 차를 세워두고 내가 차에서 먹을만한 빵과 우유를 사다 주셨다. 다리가 불편한 나는 차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아빠와 빵집에 가면 항상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골랐고 아빠는 계산만 하셨는데, 오로지 아빠가 골라온 빵을 먹는 것도 새로웠다. 맛있는 빵이 얼마나 많아졌는데, 아빠는 여전히 내가 꼬꼬마 시절 좋아했던 슈크림 빵을 제일 많이 사다 주셨다. 덕분에 아침을 거르던 내가 매일 아침 든든한 배로 출근을 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아빠에게 이런 카톡이 왔다.

아빠 밖에 와있어. 천천히 일 마무리하고 퇴근할 때 전화해.

아마 내게 카톡을 보내기 20분 전쯤에 도착하셨을 것이다.

이때 나는 눈치를 많이 보는 신입사원이었던 데다 회사가 바빴던 시기라 어떤 날은 꼼짝없이 8시, 9시까지 야근을 하곤 했다. 도저히 퇴근시간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내가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아빠는 차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셨는데, 퇴근하고 차에 타면 구겨진 은박지가 있었다. 딸이 언제 나올지 몰라 김밥 한 줄을 사다가 차에서 드셨을 생각을 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미련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에 최소 서너 번은 술 약속이 있는 아빠에게는 이 시기는 금주령이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아빠 인생 최장 기간의 금주가 아니었을까. 어느 날 아빠의 친구들이 불쌍한 친구를 위해 집 근처까지 아빠를 만나러 오셨다. 그날 저녁 퇴근하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시고는 호프집을 향해 걸어가는 아빠의 밝은 얼굴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랑하는 이가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고, 안전하게 집에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 아마 애틋한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걱정과 관심일 것이다.

운전을 못해서 누군가에게 라이딩을 해줄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이걸로 사랑을 측정한다면 억울하지만, 만약 라이딩이 사랑에 비례한다면 아빠의 사랑은 항상 최고였다.


남편도 내가 외출을 할 때, 귀가가 늦을 때 자주 라이딩해준다.

연애시절부터 내 친구들까지도 집에 데려다주곤 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남편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혹시라도 본인이 여력이 안될 때 내 친구나 친구의 남자 친구들이 나를 꼭 집 앞까지 데려다줬으면 해서라고 한다. 두 남자 덕에 나는 운전도 못하지만 유사시에 이 친구 저 친구의 차를 잘 얻어 타고 다니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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