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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고실험 Feb 23. 2024

제멋대로인 친구와의 동행

이렇게 나를 괴롭힐 줄은 몰랐지.. feat. 만년필

기다림의 도구


세상은 빠르게 동작하고 있다.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해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집에 찾아가야 했고, 만약 그 사람이 가까이 살지 않는다면 빠른 의사소통의 도구는 전화나 편지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시외전화 통화료는 결코 저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우편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과 20여년만에 세상의 속력은 매우 빨라졌다. 편지는 이메일로 대체되고, 음성 통화는 영상 통화를 대체되고, 직접 찾아가서 대화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어 수 초 이내에 전달되는 메신저로 대화를 이어간다. 블루투스 통신기기의 연결 시간 마저도 아까웠는지 오토 페어링이라는 기능까지 들어간 제품들은 제품 개봉 후 수 십초 이내에 사용 가능한 상태로 전환된다. 오죽하면 사람들의 취미이자 문화였던 독서 시간도 아끼기 위해 수 초에 불과한 짧은 영상들을 감상하는 것으로 취미가 바뀌어 나갈까 싶다.


그에 비하면 만년필은 빠른 도구가 아니다. 만년필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듣게 되는 말들이 있다.

“그건 아직 길이 덜 들어서 그래요.”

“그건 아직 유막이 충분히 벗겨지지 않아서 그래요.”

“그 경우에는 미온수에 오랜 시간 두고 세척을 해야 돼요.”

요즘 세상 기준으로 놓고 보면 참으로 불친절한 친구다. 왜 그렇게 기다림을 필요로 하고 왜 그렇게 손이 많이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연필, 샤프, 볼펜 같은 필기구들도 사용 빈도가 줄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그보다도 더 많은 손길을 요구하고 더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도구는 대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면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한 상황이기도 하다. 오래 전 지어진 수필 ‘방망이 깎는 노인’을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회사에서 퇴근을 하는 길에 그저 빨래방망이 하나를 사려고 했던 사람의 이야기. 방망이 깎는 노인은 이미 완성된 것 같이 보이는 방망이를 깎고 또 깎았다. 그 기다림은 버스를 놓치고, 식사 시간을 놓치게 만들었지만 그 사람의 아내는 빨래방망이를 보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상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날로그 시대라고 불리던 그 시점에서도 기다림이라는 것이 가져다 주는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를 깨우치며 살았던 것이 우리들이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가져다 주는 가치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기다리려 하지 않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기다림이 큰 가치를 가져다 주는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수준의 가치를 얻을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갖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큰 만족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회는 갑을 구조를 형성하려 하고 결과적으로 갑들은 을들에게 점점 더 빠른 세상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만년필은 더 재미난 녀석이다. 내가 돈을 주고 구입한 도구인데, 나보고 조급하다며 더러 뭐라고 한다. 마치 깨끗하게 세안한 후에 화장품을 바르는데 모래 하나가 얼굴에 묻은 듯 까끌거린다. 심지어 내가 최근에 구입한 만년필을 써 본 지인은 “이건 뽑기를 잘못했는데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일종의 결함이라는 것이다. 교체를 하든 수리를 받든 문제를 해결 해야만 이 결함을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이 만년필은 나에게 여지를 준다. “그래도 잉크는 문제없이 잘 나오잖아?”라고 항변하듯이 글씨가 끊기지 않고 적당한 잉크 흐름을 보여준다. 점수를 매기자면 90점 이상을 주고 싶을 만큼 이상적이다. 내 손을 거친 수십자루의 만년필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니 미련이 남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긁히는 느낌을 없애겠다고 교정을 하면 잉크 흐름이 같이 바뀔 수 있다. 고민이 된다. 긁히는 느낌을 없애고 이 만족스러운 잉크 흐름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선택하느냐.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펜촉은 종이를 긁으며 종이 섬유가 슬릿에 끼어버리고 말았다. 왜 고민하냐고 화를 내는 모양이다. “네 마음대로는 안될 걸.”이라는 말을 에둘러 던진다.


오기가 생긴다. 네까짓 게 하면 얼마나 하겠냐? 이미 수십자루를 경험한 내가 너 하나를 감당 못하겠냐고 생각하며 펜 파우치의 1번 자리에 이 만년필을 넣었다. 오랫동안 많이 써야 길이 난다. 마음이 급해져 빨리 길들이겠다고 힘을 줘서 써 버리는 순간에 촉의 탄성이 떨어져 버리고 슬릿이 벌어진다. 내가 써야 하는 글이 아닌 엉뚱한 글을 억지로 쓰면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결국 내가 써야 하는 글을 대부분 이 만년필로 쓰는 것이 최선이다. 메모를 할 때 꺼내고, 서명을 할 때 꺼내고, 수학식을 풀 때 꺼낸다. 이 글도 저 글도 다 하나의 펜으로 쓴다. 가득 채운 카트리지 하나를 다 썼는데도 변화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일주일이 다 가도록 글씨를 거의 쓰지 못하는 때도 있다. 파우치 안에 있는 만년필이 “이렇게 쓰다가는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걸.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괜히 한 번 꺼내서 몇 마디 끄적, 가로 세로 줄을 그어본다. 여전히 변화는 없다. 그 옆에 있는 만년필도 투덜댄다. 그렇게 제 멋대로인 녀석에게만 관심을 주고 왜 나한테는 관심을 주지 않느냐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너에겐 파란 잉크를 넣어 줬으니 파란 글씨를 써야할 때는 너를 꼭 꺼낼거야, 라고 눈짓을 한 번 보내준다.


시간이 더 지난다. 카트리지는 열 번 이상을 바꿨다. 은근히 긁히는 느낌이 잦아들었다. 어떤 경우에는 긁히는 느낌이 없어서 한 번씩 놀라기도 하지만 자세가 조금 바뀌면 여전히 긁히는 느낌이 남아있다. 그래도 괄목할만한 성장은 있다. 종이를 긁어 섬유가 피드에 끼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6개월정도만의 일이다. 학생때는 1~2주정도면 같은 분량의 글씨를 썼겠지만 이공계열 연구원으로 살면서 그렇게 많은 글을 쓰진 않는다. 다만 그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렇게 긴 기간이 지나는 것도 그리 조바심이 나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시간동안 나를 긁어대는 것 말고는 말썽이 없었던 만년필에게 조금은 고맙기도 하였다.


어느 시점에서는 만년필을 길들이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의식 없이 글을 쓰고 있었고 나는 이 펜에 익숙해져 있었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녀석은1번 만년필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트리지 숫자로 본다면 대략 2~30개정도 쓴 것 같다. 결코 적지 않은 양이다. 완전히 만족스럽다고 볼 순 없다. 다만 어떤 면에서 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펜이 되어 있었다. 만족스럽다. 게다가 더 재밌는 것은 아직도 이 펜은 변화중이라는 것이다.


1년 6개월. 현재 시점까지 왔다. 세일러 만년필은 부드럽게 써 지는 연필의 사각거림이 매력이라고 한다. 이 만년필은 이제 그 느낌에 가까워졌다. 좋은 펜을 뽑아서 충분히 길들였을 때 가질 수 있는 느낌을 이제 슬며시 나에게 보여주고 있다. 매력적이고 또 믿을만하다. 이 만년필이 처음 나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던 것이 이런 것일까. 이렇게 좋은 잉크 흐름을 가진 펜은 결코 사용자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 만년필은 내 동료이자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이제서야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년필은 사람을 닮아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매력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는 단점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와 맞지 않기에 단점이라고 보는 부분도 있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그 사람과 친해지려 하지 않거나 혹은 그 장점을 보며 나머지를 참아 넘기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사람을 마주할 때 마다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경우에 따라 그 불편함은 점점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나 스스로가 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인연으로 남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조급해 하지 않고 충분히 긴 시간을 두고 꾸준히 접촉해가며 함께해간다면 그 시간 속에서 서로 맞지 않았던 날카로운 날들이 서서히 닳아지며 어느 시점에는 가장 듬직한 동료로, 또 친구로 남게 되는 것이 사람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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