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의 첫 아침은 스위스에서 맞았다. 부지런하게 스케줄을 확인한 뒤 호텔을 나서자 애저녁엔 보이지 않던 풍경이 '확' 하고 들어왔다. 여행의 시작인 스위스의 리기산으로 가는 길, 트램을 타고 유람선을 탄 뒤 호수를 지나 산악열차를 타고 산 정상으로 가는 꽤나 긴(?) 여정에 잔뜩 긴장감을 머금고 여행을 시작했다.
트램을 타기 위해 이동한 정류장에서는 손에 검붉은 매니큐어를 바르고 히피펌을 한 30대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맛깔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실내를 제외하면 모든 곳이 암묵적으로 흡연이 가능했기에 스위스에서 안 좋은 기억을 하나 꼽자면, 정말 아름다운 절경을 두고 담배를 태우는 것과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사람들이 흡연을 하는 모습을 보며 굉장히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만 제외하면 정말 멋진 나라였다.
어쨌건, 나와 내 아내는 트램을 한번 잘못 탄 뒤에야 정확한 방향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냈고 그렇게 무사히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초보사진가인 나는 남는 건 사진이라는 아내의 말에 서툰 솜씨로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비록, 버리는 사진이 생겼을지라도.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자 기차역부터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연신 감탄을 내뿜는 나를 보고 유럽에 몇 번 와본 아내는 키득키득 웃곤 했다.
스위스의 아침은 흐린 탓에 해가 뜨지 않았고, 호수가 주변에 있어 물안개가 자욱했다. 나라의 특성상 밝은 컬러보단 베이지나 원색톤의 건물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첫 스위스의 이미지는 '회색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성 같은 멋진 기차역과 출근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이곳이 익숙해진 탓에 시니컬하게 다니는 사람들의 잔상이 다시금 떠오른다. TV나 영상에서만 보던 곳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의 감동, 그 하나로도 이미 여행의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는가?
실은 유럽여행에 대한 기대가 조금은 낮았었다. 살인적인 물가가 두려웠고, 낯선 환경과 아내를 보호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실로 대단했다. 아내와 처음으로 가보는 해외는 아니었지만 먼 나라라는 '낯섦'이 나를 스스로 옥죄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날 호텔에서 맞은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여행이라는 느낌이 크게 체감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여행지를 위해 난생처음 트램을 타보고, 영상에서만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조금씩 뭉클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행엔 목적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목적이 존재하기에 도리어 경로에서 벗어날 때 실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누군가에겐 평범했을 기차역과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서도 감동을 받았던 이유는 뚜렷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얻고자 여행을 시작했다면 어떠한 이유를 끼워 맞춰서라도 행복한 이유를 찾고자 노력하겠지만, 큰 사고 없이 때로는 천천히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바, 더욱 큰 울림을 느낀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난, 또다시 마음먹었다. 조금은 느리게 걸어야겠다고. 목표가 없을지언정, 경로가 바뀔지언정, 나를 위해, 삶의 풍경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느리게 걸어야겠다고.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보면 느린 거북이가 오히려 경주에서 승리하지 않던가. 속도보단 방향이 중요한 경주이므로.
두려워하지 말자. 비교하지 말자. 늦었다는 생각에 불안해질 때면, 내가 걸어온 길을 천천히 둘러보자. 그럭저럭 잘 가고 있다며 나를 다독이자.
비록, 조금은 버리는 시간이 생겼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