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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Dec 26. 2023

[D-6] 마음에 로션을 바르고 싶어

360번째 글

겨울을 견디기 어렵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건조한 공기이다. 차라리 추운 날씨는 참을 만하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지만 추우면 옷을 껴입으면 되고, 되도록 실내에서 따뜻하게 있으면 어느 정도 괜찮다. 하지만 건조한 공기는 어딜 가도 피할 수가 없다. 밖에 나가면 매서운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리고, 안으로 들어오면 난방을 계속 틀고 환기도 적게 할 수밖에 없는 사정 때문에 실내 공기가 아주 건조하다. 나처럼 극도로 건성인 피부를 가진 사람에게는 아주 괴로운 점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먼저 느낀다. 피부가 건조해서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면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또 각질이 일어나거나 쩍쩍 갈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면 그건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건조한 피부를 갖고 있다 보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가을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는 순간부터 보습에 아주 신경을 쓴다. 전신에 로션을 잔뜩 발라 주는 건 물론이고, 립밤이나 핸드크림도 자주 발라 주고, 작은 로션을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피부에 덧바르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 그 자리에 로션을 발라 주기 위해서다. 안 그러면 피부가 하얗게 일어나거나 심한 경우 쩍쩍 갈라지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팔에 로션을 바르며 나는 생각했다. 피부가 건조해지면 로션을 바르면 되고, 입술이 건조해지면 립밤을 바르면 되는데, 마음이 건조해지면 대체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를. 나는 요즘 부쩍 감정이 메마른 듯한 기분을 느낀다. 워낙 바쁘고, 신경 쓸 일들도 많고,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다 보니 감정을 깊이 느끼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거나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고작이다. 예전 같았으면 보면서 펑펑 울었을 텐데. 음악이나 공연을 봐도 예전에는 훨씬 더 풍부한 감정과 깊은 감동을 느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저 '좋다' 정도의 감상을 받기도 한다. 여러모로 무덤덤해진 것 같다. 감정의 폭도 좁아졌고. 여러모로 감정을 느끼는 데에 쏟을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 말라 버린 마음을 다시 촉촉하게 적셔 줄 마음의 로션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내린 결론은, 마음의 로션은 바로 사람과 예술이라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건조함을 잊을 수 있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를 둘러싼 관계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관계들이 나를 지지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은 때때로 나를 지치게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다채로워지곤 한다. 또 나의 마음은 예술을 통해 더욱 다양한 색채로 칠해진다. 예술은 내게 감동을 주고, 예술은 내게 여유를 주고, 수많은 감정들 속에 나를 빠트린다. 내가 살면서 평생 겪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겪어 볼 일 없을 이야기들과 감정들을 내가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예술을 통해 나는 촉촉해지고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과 예술을 통해 마음을 촉촉하게 해 주기 위해서는 여유와 체력이 필요하다. 로션을 갖고만 있는다고 해서 보습이 되는 건 아니니까. 피부를 건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로션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발라 주는 것처럼, 마음을 건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정성 들여 로션을 발라 주어야 한다. 내 마음이 건조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여유, 건조한 부분에 로션을 바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 로션을 챙겨 다닐 수 있는 체력, 꺼내서 이곳저곳에 발라 줄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여유와 체력이 있어야만 내 마음은 다채로워지고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메마른 마음에 로션을 바르고 싶다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작품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좋은 사람과 좋은 작품을 찾아서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여유와 체력을 길러야 한다. 내년에는 과연 얼마나 촉촉한 마음으로, 얼마나 보습이 잘 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거칠어진 손등 피부에 로션을 바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
2023년 12월 26일,
책상에 앉아 웅웅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Steve Johnso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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