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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Dec 28. 2023

[D-4] 그게 당연한 건 아니잖아

362번째 글

나는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곤 한다. 예민한 성격이다 보니 일상생활 속의 사소한 일들을 계속 곱씹거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이 많아서, 그러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무언가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저 사람이 내게 왜 그랬을까, 왜 하필 나일까, 무슨 의미로 그런 걸까, 같은 생각들을 하다 보면 마음이 괴로워지고 피곤해진다. 이럴 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도움이 된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레 감정들과 사건들을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럴 일이 있었다. 커피를 텀블러에 테이크아웃해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오던 사람이 나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넘어질 뻔했고 중심을 잡느라 커피를 손에 약간 쏟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돌아봐서 그걸 다 보았음에도 사과 한마디 없이 그냥 휙 고개를 돌리고 가버렸다. 엎질러진 커피와 젖고 끈적거리는 손과 혼자 남겨진 내 기분이 확 나빠진 건 당연했다. 화도 났고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 사람은 멀어지고 있었고 내 성격상 뭐라고 하지도 못할 거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사람이 경황도 없고 여유도 없었던 데다가 너무나도 바쁜 일이 있어서 그냥 가버린 거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더는 생각하지 않고 넘겨 버렸다. 그러자 짜증이 올라왔던 게 금세 가라앉았다. 나는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오래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이런 화가 날 만한 일이 있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렸다고 말이다. 내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친구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게 당연한 건 아니잖아."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내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해 왔던 건 단지 스스로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는 조치였지, 그게 정말로 당연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어서가 아니었다. 그 일은 기분 나쁠 만한 일이 맞았고, 그 사람은 무례한 게 맞았다. 내가 그걸 흘려보내기 위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을 뿐.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깨달았다. 내게 어떤 부당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 대해서 대신 변명해 줄 필요는 없다는 걸. '그럴 수도 있지'가 나쁜 건 아니지만 이건 그저 부정적인 감정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위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한 수단이고, 나 자신을 위해 개인적으로 쓰는 방편일 뿐이다. 그런 일은 당연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하게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일 자체를 당연하게 생각해 버려서는 안 된다. 자칫 잘못하다간 불의를 보고도 그냥 참고 넘기거나 타협하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 목소리를 내야 할 일에 침묵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되니까. 기울어진 저울을 두고도 기계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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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8일,
침대에 엎드려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Datingscout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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