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장래희망가로 살아가기
오늘의 장래희망가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년 전 퇴사를 하려다가 말았고, 그 뒤 1년을 더 다니다가 결국 퇴사를 했다. 퇴사결심을 회사에 통보한 뒤 여러 번 설득당한 끝에 번복하기까지 아주 많은 말들이 내 속을 어지럽혔다. 여러 사람들에게 내뱉어도 시원치 않고 마땅치 않았던 마음들이 나를 괴롭혔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마음이 풍선처럼 떠올랐으면 좋겠어. 아무렇게나 묵직한 마음에 구멍을 내고 흩트려놓기엔 글이 적당했다. 글을 쓸 때는 어떤 사람의 판단이나 평가도, 추임새도 없으니까. 그땐 온전히 나를 위로하고자 이 글을 써 내려갔던 것 같다. 다시 이 글을 꺼내 다듬고 덧붙인다. 아팠지만 필요했던 한때를 기억하기 위해.
퇴사를 하겠다는 말은 모든 회사원들의 내적 애창곡이며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이다. 나는 실제로 팀장님께 매년 퇴사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못 해 먹겠어서 때려치우겠다는 의미보다는 새로운 것을 위해 모험을 떠나겠다는 굳센 의지의 말이었다. 어느 해에는 팀장님이 '퇴사를 하지 않고 계속 다녀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누군가는 상사에게 그런 말은 숨겨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때, 내가 정말 그러고 싶은걸. '나는 스스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멋있게 회사를 떠난다'라는 목표로 나그네의 마음을 잃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일은 열심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으로, 그렇게 한 해에 한 번씩 퇴사를 결심하며 시간이 흘렀다.
조직이라는 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기왕이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용하고 나가려고 했다. 슬슬 권태기가 왔던 입사 3년 차쯤엔 팀장님께 계속해서 다른 업무를 요청해 신규 업무를 맡게 되었고 매년 이 팀, 저 팀 전보 희망을 써서 냈다. 기회가 있었지만 파트를 돌봐야 하는 선임으로서 좀 더 남아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5년을 꽉 채운 어느 날, 각 부서의 퍼즐이 들어맞아 드디어 새로운 팀으로 옮기게 되었다.
오래 했던 홍보마케팅 업무는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상품을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소문내는 일이 체질이었고 재밌어서 선택했던 일이라 열심히 하고 그에 따른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일과 별개로 사람이 많은 팀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지치는 것이기도 했다. 입사 이후 아주 잠깐의 시간 말고는 쭉 나는 선배이며 대부분 파트의 선임이었다. 중간에서 의견을 조율하고, 후배들을 교육하고 독려해야 하는 일들이 잘 맞으면서도 가끔은 어렵기도 했다. 일뿐만 아니라 관계 스트레스가 어느새 나의 해결치를 넘어섰다. 나 홀로 평정심을 유지하기에는 벅찼고 모든 것을 감당할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좋아한 일과 사람들이었기에 너무나 애틋한 마음으로.
새롭게 옮긴 팀은 이 회사에서 내가 정한 마지막 전장이었다. 어쩌면 내가 제일 좋아하지 않을 일, 그리고 이전의 동료가 너무 힘들어서 하루가 다르게 우울의 얼굴을 갖고 탈출하고자 애썼던 곳. 궁지에 몰려 생긴 용기가 주변 사람 모두가 말렸던, 그 동료가 탈출하고 남은 한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도 내가 경험하는 건 또 다를 테니까, 한편으론 나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과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난 또다시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9월쯤 자리를 옮겼을 땐 끝을 향해 달려가는 여러 사업들이 남아 있었다. 한참 진행된 사업들을 이어받아 마무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도 배워야 하지만 그동안 쌓여 온 히스토리 안에서 일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일정도 압박이 됐다. 누구를 원망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9월과 10월 그리고 11월과 12월이 무참히 흘렀다. 그러다 회사의 새로운 수장이 부푼 꿈을 안고 입사를 했고 신사업을 맡아야 하는 팀의 특성상 바로 사업에 착수했다. 그마저도 바로 계획을 세우고 공지를 해야 한다는 팀장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정임을 설득한 끝에 몇 달은 벌었지만 매일 야근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 이후 어느 때는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그러나 기억되지 않고 추억으로 남지 않는 매일이 갔다. 2022년 보상휴가를 조회해 보니 19일 하고도 몇 시간. 평일 12시간과 휴일 이상으로 근무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니 다른 때보다 과하게 일을 했다. 일이 몰아쳤던 연말에는 휴가를 쓰고도 여러 날을 일했다. 바쁜 몇 달과 또 몇 달은 출근하자마자 전투 모드로 일을 하고 점심은 책상에 앉아 김밥으로 때우는 날이 계속되었다. 목은 뻗뻗해지고 허리는 아파왔다. 퇴근한 이후에도 불안한 마음이 들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잡다한 일을 밤까지 이어갔다. 하나의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이 생겼다. 엄청난 돌덩이를 작은 곡괭이로 잘개잘개 부셔나가고 있었는데 다시 큰 돌덩이가 툭 하고 떨어졌을 때의 절망감. 나는 그 순간 참지 못하고 모니터 앞에서 울었다. 울면서도 이 슬프지만 웃긴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내가 지금 일한지가 얼만데 과장이나 되서 이렇게 책상에서 울다니...'
익숙하게 했던 일들이 아니니 모든 것이 더 불안하기는 했을 테지만, 가르쳐 주는 선배가 있는 것도 그럴만한 연차도 아니었던 것이 더 나를 압박했던 것 같다. 매일같이 업무 카톡과 전화로 수 십 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말을 잊지 않고 해결해 주기까지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쓰였지만 그들을 만족시키고 싶은 마음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내 몸은 하나였다. 어느 순간 뇌가 지진이 난 듯 조각조각 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잔뜩 쌓인 일들로 잠을 못 이루고 있을 때 그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불안이 되어 나를 덮쳤다. 할 일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잠에 들지 못하고 숨을 의식적으로 내쉬며 다독여야 할 정도였다. 차라리 침대에서 일어나 일을 하거나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제일 무서웠다. 한참 후에 상담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공황장애의 초기 증상이었을 거라며, 전화라도 하지 그랬냐는 얘기를 들었다.
마음과 몸이 모두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계속 불렀던 퇴사의 돌림노래였지만 이렇게 끝이 처참할지는 몰랐다. 희망찬 나의 미래를 위해 웃으며 퇴사를 하고 싶었지 아픈 채로, 미워하는 마음으로, 해결되지 못한 모습으로 그만두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던 말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연말에 마무리하면 퇴사를 해야지 굳게 결심을 했다. 하지만 그 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팀장님의 퇴사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