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장래희망가로 살아가기
흰 바탕 앞에 앉은 지 벌써 3시간이 지났다. 데모에 어울리는 컨셉을 떠올려 보지만 그 어떤 상상도 되지 않는 상태로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사실 이 곡에 들인 시간은 그 이상이다. 어제처럼 오늘도 밤을 새울까, 그러면 가사가 나올까. 차라리 잠을 자고 좋은 컨디션으로 내일 곡을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 얼마 전 작가로 등록해 놓은 브런치라도 쓰자! 하고는 로그인을 했다. 앉아 있었던 오랜 시간에 대한 보상처럼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잔뜩 이곳에 남기고 싶어서.
긴 글의 밑바탕이 되는 짧은 자기소개를 하자면 일 한지는 12년, 한 회사를 8년 정도 다니다 퇴사한 지 3개월 차, 작사가 지망생, 제과학원을 다니는 백수 아닌 백수, 자체 안식년을 갖고 있는 장래희망가이다.
꽤 오래 일을 한터라 알람이 없어도 버릇처럼 아침 일찍 눈이 떠지고 일어나면 씻고 자외선차단제까지 바르는 수고로움을 한두 달 정도 지속했다. 눈이 떠진 뒤에 몇 시간을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는 꽤, 잘 지켜왔지만. 그러다가 세 달쯤 되니 모든 게 자연스럽게, 몸이 원하는 대로 혹은 게으르게 맞춰졌다. 작사를 한답시고 새벽 늦게 자서 다음날 늦게 일어나 늦은 점심을 먹고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부터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는 삶. 너무 좋은데 마냥 좋지만은 않은, 뭔가 모르게 불편한 하루하루가 내 인생에 쌓이고 있다. 요 며칠 기분이 별로라 왜 그런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걸려온 전화에 이런 마음이 반반씩 있다고 말로 꺼내 놓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상황을 파악한 것 만으로도.
금요일 저녁 제과학원을 갈 때면 갑자기 생긴 시간개념에 일주일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아무 데이터도 읽히지 않는 사실이 당황스럽다. 이렇게 무가치하게 시간들이 흘러갔나. 이러려고 퇴사한 거지만 내 시간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너무 아깝잖아. 이런 생각에 브런치를 다시 열었다. 나만 보는 일기장에 적어도 무방할 글들이나 누군가에게 읽혀 외로워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글을 남긴다.
회사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느라 열을 식힐 틈이 없었던 부품이 하루의 9시간을 걷어냈을 때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질지 고민해 보는 글들도 주가 되지 않을까.
오늘은 결국 한 곡의 기회보다는 피곤한 나를 달래러 침대로 향한다.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으로 무거웠던 마음을 오늘은 접어둬야지. 아직도 자신을 예뻐하지 않는 나에게 구름 가듯 지나간 오늘 하루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해 줘야지. 아마도 앞으로 남기는 글들은 나를 달래기 위한 것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