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날한 날 May 01. 2023

장래희망가가 되었습니다.

퇴사하고 장래희망가로 살아가기: 퇴사한 사람을 뭐라고 부르나요.

일주일에 두 번 학원을 다닌다. 화요일엔 작사학원, 금요일엔 제과학원. 두 곳 모두 회사를 다닐 때부터 병행하던 곳이지만 재직했을 땐 그저 갓생, 백수인 지금은 유일하게 생산적인 일정으로 분류된다.


제빵제과는 배운 지 벌써 1년 반째로 제빵기능사는 합격, 제과기능사는 실기를 앞두고 있다. 홈베이킹을 해본 적이 없던 터라 기능사 반을 듣고 또 하나씩 반을 추가로 들었다. 뭐든 몸에 익혀야 도전을 할 수 있는 성향이라 연습할 겸 해서 시간을 더 썼다. 일할 때는 전날 야근하고 다음날 주말 출근을 할 때도 기를 쓰고 학원에 갔다가 출근을 했다. 그게 더 힘나게 하는 일이었으니까.

작사는 어느새 9개월 차, 비기너-인터반을 지나 프로반에 안착하였다. '프로'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는 부끄러운 그런 상태이다. 회사 다닐 때는 학원 다니면서 과제하고, 시안을 제출하느라 일주일에 며칠은 퇴근하고 집에 오면 다시 일을 시작하는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어깨에 내려앉는 곰과 짙어지는 다크서클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집에 한없이 늘어져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내 몸을 일으키게 만드는 기특한(?) 내돈내산들.


"다들 네가 뭐가 될지 궁금해해. 제빵사가 될지, 작가가 될지."


얼마 전 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전화기 너머로 엄마가 말했다.

‘너무 재밌는 말이야. 이 나이에 뭐가 될지 궁금한 사람이 되었다니!’

가능성이라는 달콤함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퇴사를 한 건 이 가능성 때문이었으니까.


한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새 돌아가는 판이 뻔히 보이고, 하는 일들도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일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새롭게 생겨나는 프로젝트들이 있지만 그 또한 일하는 과정도, 방식도, 결과도 비슷할 것이다. 노련해짐으로써 얻어진 안정감이 어느새 내 인생에 새로운 건 없을 것이라는 권태로 다가온 그런 때였다. 사람은 희망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나에게 직장은 내가 이곳에 머물면서 더 좋은(여러 의미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원체 자꾸 다른 것들이 궁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꾸 퇴사의 꿈을 꾸었다. 입사 3년 차 때부터 팀장님과의 면담 때마다 농담처럼 새로움을 위해 퇴사를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8년이나 다녔으니 꽤 오래 꿈을 꾸며 살았다. 1년 전에 이미 퇴사를 얘기했다가 여러 설득으로 다시 주저 앉았던 터였다. 그후 1년 동안 상처난 곳들을 매만지고 회복했다. 그리고 끝을 향해 달렸다. 활의 시위도 끝까지 당겼다가 놓아야 쏘아지듯, 이번엔 응축된 퇴사의 결심을 내뱉었다.

현재의 일 또한 아끼던 것이었기에, 그리고 성격상 직장을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도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정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에 쥔 게 없을 때 오히려 새로운 것들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장래희망가가 되었다.

퇴사한 사람을 보통 뭐라고 부르지? 지금의 나를 정의하기에 '백수'라는 단어는 맞지 않는 듯하다.

올 해는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일해 온 나에게 쉼을 주고, 다음 직업을 찾는 자체 안식년으로 보내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현재 직업이 없다기엔 작사가 지망생, 베이킹 꿈나무로 나름 일정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그럼 ‘무엇의 지망생’ 혹은 ‘장래희망가’ 정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을 즐기면서 살려고 한다. 실상은 뭐 그렇게 열심이지 않지만, 한동안은 이 바이브를 타고 기분 좋게 지낼 것이다.


퇴사를 하면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제안받기도, 기회가 생기기도 했지만 모두 마음에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지 않는 시점에 살짝 흔들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퇴사의 이유에 맞게 나의 우선순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일이 생기면 스스로에게 선물한 여유 시간이 침범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 생활이 3개월 정도 되면서 슬슬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게을러진 몸뚱이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지만 아직은 이르다, 이르다라고 마음이 외치고 있다.


언젠가 재촉은 통장 잔고가 해줄 것이니 당분간은 장래희망가로!

작가의 이전글 나를 달래기 위한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