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카피는 ‘방향도 없고, 의미도 사라지고 깊은 허무에 빠진 현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비대면 시대가 지나고 다시 대면의 시대가 왔지만, 여전히 비대면과 같은 세상이다. 가족이 같이 식당에 가도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고개를 숙인 모습이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일상이다. 이 책은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는 현대에 대한 통찰과 인류가 겪고 있는 대화의 부재에 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한마디로 스마트폰과 온라인이 대세인 세상에 대한 경고이다.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책이다.
저자는 현대를 “억압도, 저항도 없이 스마트한 이 지배 체계에서 우리는 삶을 게시하고 공유하고 좋아
하도록 지배당한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 느낌,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라고 말한다.
“삶은 이야기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옮긴 이의 말이다.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로서의 이론은 사물들을 관계성 안에 집어넣은 후에도 왜 그렇게 관계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질서가 있다.
이론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을 발전시킨다. 빅데이터와 반대로 이러한 질서는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고차원적 형식, 즉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사물을 개념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종결 형식이다. 반면 빅데이터는 완전히 열려 있다. 종결 형식을 띤 이론은 사물을 개념적 틀에 담은 후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적 개념과의 작별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개념 없이도 작동한다. 지능은 정신이 아니다. 사물의 새로운 질서, 새로운 이야기는 정신만이 할 수 있다. 지능은 계산하고 센다. 정신은 이야기한다. 데이터 기반 정신과학은 정신을 탐구하는 과학이 아니라 데이터과학이다. 데이터는 정신을 몰아낸다.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영점에 해당한다. 데이터와 정보로 가득한 세상은 이야기할 능력을 위축시킨다. 그 결과 이론은 잘 구축되지 않으며 매우 모험적이기까지 하다.
서사, 즉 이야기에 내재해 있는 전승적 지식은,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구조로 되어있다. 일단 지식은 ‘멀리서’ 온다. 이러한 원격성은 지식의 본질적 특성이다. 원격성의 점진적 해체는 근대의 특징이다. 정보란 모든 것을 가용범위에 두는 이러한 무간격성의 자연적 발현이다.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서사 없는 삶은 그저 첨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삶은 살아갈 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장면은 바뀌고 사람들은 오고 가고 그게 다다. 시작 지점은 없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지는 날이며 의미도, 지성도 없고 멈춤 없는 단조로운 연속적 나열에 불과하다.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수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셀카 중독마저도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야기에는 여유가 필요하다. 가속화된 소통 속에서는 이야기할 시간, 즉 참을성이 없다. 정보만 교환될 뿐이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이야기의 동기가 된다.
『와이어드』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은 에세이 「이론의 종말」에서 “요즘 같은 거대 데이터 시대에 성장한 구글 같은 기업들은 굳이 불만족스러운 모델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사실 모델 자체를 유지할 필요도 없다.” 그의 말에 따르면, 데이터 기반 심리학 또는 사회학은 인간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론은 직접적인 데이터 비교로 대체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것이 되었다. 분류체계, 심리학마저 전부 잊어라. 인간이 왜 그런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숫자가 알아서 말해줄 것이다.
빅데이터는 사실상 설명하는 것이 없다. 빅데이터에서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만이 파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관관계는 지식의 가장 원시적인 형식이다. 상관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없다. 빅데이터는 사물이 왜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인과적 맥락도, 개념적 맥락도 생성되지 않는다.
서사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날것의 사실 또는 숫자보다 효과가 좋다. 감정은 무엇보다 서사에 반응한다. 스토리를 판다는 것은 결국 감정을 판다는 말과 같다. 감정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신체의 본능 층위에서 행동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에 그 시스템을 두고 있다.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으로써 인지적 방어 반응조차 피해 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전유함으로써 전 반성적 층위의 삶을 점령해 버린다. 그럼으로써 의식적 통제와 비판적 성찰을 피해 간다.
책 소개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2023.09.15. 다산북스. 143쪽. 16,800원.
한병철.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 예술대학교 철학, 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저서. 『피로사회』, 『리추얼의 종말』 등.
최지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일어 공부, 통번역대학원에서 통역 전공으로 석사 취득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강의하며 충북대학교 인문학 연구소에서 통번역 에디터 과정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