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노래방>
그래, 어차피 한 번 부르나 두 번 부르나 놀림받는 건 똑같다. 그럼 이번 기회에 좋아하는 노래나 실컷 불러 보자.
그런 생각으로 마이크를 또 잡았다.
“오! 앙마 또 부른다... 뭐야, 이번에도 일본 노래야?”
다윗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가 쭉 내려갔다.
“불만 있어? 언제는 오타쿠라며.”
“기왕이면 알아들을 수 있는 걸로 불러. 가요나 팝송.”
“너 들으라고 부르는 거 아니거든. 듣기 싫음 귀를 막든가.”
이번에 고른 곡은 “천 마디의 말”. 템포도 느긋하고 가사도 다 외우고 있기에 여유가 생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나는 댄스 곡이었던 이전 노래와 달리 잔잔한 전주가 흐르자, 힐끔힐끔 쳐다보던 아이들도 슬슬 관심을 끄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런데 분명 시유와 같이 앉아 있던 아랑이 어쩐 일인지 정우 옆에 가 있었다. 두 사람은 정우 것으로 보이는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 ウソを全部覆い隠してる(거짓말을 전부 감춰버리고 있어).”
아랑이 활짝 웃었고, 이어서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 ズルイよね(비겁하네).”
아랑이 정우에게 날 만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정황상 어제 나랑 헤어지고 난 이후의 시점.
즉 아랑이 정우에게 따로 연락을 했다는 건데, 이 말은 곧 아랑과 정우가 그만큼 가까운 사이란 거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평소에도 두 사람은 뭔가 달랐다. 왠지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은 친밀감이 둘 사이에 있었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서 긴가민가 했었는데, 그것도 일부러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쩐지. 어제 노래방에서 분위기가 이상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런 거였구나. 이제 정우한테 뭐라고 대답하지? 설마 나 오해산 건 아니겠지?’
나는 어제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우연이긴 하지만 아랑과 만났고, 밥도 같이 먹었다. 게다가 오르골을 갖고 싶다길래 따로 가서 사려고도 했다...
‘완전 오해 살만 하잖아!’
나는 빠르게 정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건 표정관리인가? 아니면 덫?
‘그냥 모른 척 시치미 뗄까? 아냐, 정우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건 너무 위험해. 그럼 사실대로 이실직고하고 별일 아니었다고, 난 전혀 몰랐다고 할까?... 그런다고 이해해 주겠냐, 이 바보야!’
마음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우물쭈물 시간만 보내고 있던 그때, 우릴 향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저 발소리. 아랑이다.
“하아, 하아.. 너희 일찍 왔네? 힉! 벌써 줄이 이렇게 길어?”
타이밍이 안 좋다.
아니지, 오히려 잘된 건가? 다른 애들 오기 전에 삼자대면을 하는 편이 나을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서 눈동자만 굴렸다. 정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랑을 맞이했다.
“그러게. 우리가 미리 줄 서길 잘했지?”
“응. 잘했어, 잘했어.”
둘은 지극히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너무 멀쩡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나와 아랑을 꾸짖는 정우와, 오해라며 눈물을 흘리는 아랑, 중간에 껴서 절절매는 나. 무슨 3류 로맨스 영화나 아침 드라마에서 볼 법한 장면을 상상하고 있던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한술 더 떠서 정우는 아까 나한테 물은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나는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나 두 사람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그러자 아랑이 날 위아래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 뭐 해? 설마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
“내, 가 도망을 왜, 가..?”
“그럼 줄 똑바로 서. 안 그래도 혼잡한데.”
아랑의 손이 내 팔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발은 그 자리에 붙은 그대로 상체만 앞으로 기운 상황.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요상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아랑의 손을 뿌리치고 힐끔 정우를 보았다. 그는 우리가 뭘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뭐지? 내가 오해한 건가? 그럼 아까 그 의미심장한 질문은 뭐냐고?’
평온한 정우와 재잘대는 아랑, 어색한 나. 불편한 시간이 흘렀다.
약속시간이 되자 드디어 다윗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아! 다들 와 있었구나.”
“늦었어! 빨랑 안 뛰어 와?”
반가운 마음에 나는 대뜸 다윗에게 핀잔을 주었다. 다윗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보고는 볼멘소리를 했다.
“늦긴 뭐가 늦어? 딱 제시간에 왔구만! 하여튼 성격 더러워.”
“약속에 제시간에 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러는 넌 언제 왔는데?”
정우가 씩 웃으며 끼어들었다.
“솔이는 무려 20분 전에 왔대.”
“히익! 왜 그렇게 일찍 왔어? 아하~ 우리랑 놀 생각에 너무 신나서 그랬구나? 귀연 녀석~”
“무슨~ 귀여운 건 너지. 이참에 발로 밟아서 더 귀엽게 만들어 줘?”
“우씨! 부모님이랑 키는 건드는 거 아니다!”
다윗과 투닥거리고 있자니 평정심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정우가 시계를 보며 아랑에게 물었다.
“시유는 다 와간대?”
“글쎄.. 방금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 답이 없네. 온다고는 했는데... 미안해, 얘들아.”
“아냐, 괜찮아. 네 탓이 아닌걸. 개장 전이니까 시간도 있고.”
정우가 미안해하는 아랑을 다독였다. 시유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일부러 다윗한테만 말을 걸었다.
10여 분 뒤, 시유가 도착했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우리 셋을 무시하며 아랑 옆자리를 꿰찼다. 시유에게 밀려난 정우는 우리와 합류했다.
나는 아랑과 시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곁눈으로 정우의 기분을 살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윗과 얘기하고 있었다.
‘뭐지, 이거? 헷갈려 죽겠네.’
마침내 놀이공원 입장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윗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놀이공원 진짜 오랜만이네. 유치원 때 와보고 처음이야.”
정우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정말? 혹시 여기 이사 온 거야?”
“이사를 한 번 하긴 했는데... 원래부터 이 동네에 살았어. 아빠 교회가 근처에 있어서.”
“그럼 줄곧 여기서 산 거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안 왔었구나.”
“그게... 원래 자기 동네에 있는 건 잘 안 가잖아, 하하...”
“하긴 그렇지. 솔이 넌 어때? 놀이공원 좋아해?”
“모르겠어. 나도 쟤랑 상황이 비슷해서.”
“그래? 이번에 놀이공원 아이디어 아랑이가 낸 거지?”
“응.”
“잘 정했네.”
“글쎄...”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굉음과 비명소리가 우릴 맞이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놀이기구 탈 줄 아나?’
“우리 뭐부터 탈까? 저거 어때!”
흥분한 다윗이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로 롤러코스터를 가리켰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롤러코스터 레일을 눈으로 좇고 있자니 현기증이 일었다.
“그전에 우리 기념사진 찍자. 놀이기구 타면 머리 다 망가지고 엉망이잖아.”
아랑의 제안에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기 어때? 다들 서. 내가 찍어줄게.”
“안 돼, 다 같이 찍어야지. 잠시만... 아, 저기요~ 죄송한데 저희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아랑이 갑자기 다소곳한 척 콧소리를 내며 지나가던 커플에게 부탁했다. 인상 좋아 보이는 그들은 흔쾌히 승낙하며 아랑의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어, 다시 한번 찍을게요. 자, 웃으시고~ 웃어요~ 하나 둘 셋!... 확인해 보시겠어요?”
전화기를 돌려받은 아랑의 표정에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아랑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어준 커플에게 인사를 했다.
“예, 이거면 돼요. 정말 감사합니다~”
커플이 떠나고, 아랑이 나를 흘겨보았다.
“표정이 이게 뭐야? 좀 웃지?”
“원래 그렇게 생긴 걸 어쩌라고.”
“에효, 몰라. 다 네 흑역사지 뭐. 사진은 나중에 집에 가서 모두한테 돌릴게.”
“그럴 거 없이 우리 단톡방 하나 만들어서 거기다 공유할까?”
“그럴까? 그러자. 그 편이 더 편하겠네.”
지금 보니 확실히, 아랑과 정우 저 둘은 쿵짝이 잘 맞는 거 같다. 여태껏 배려심 많은 정우의 성격이라 여겼었는데.
이제부턴 진짜 조심해야 되겠다.
‘어제 오르골 샀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당장 월요일에 가서 안 사겠다고 말씀드려야지. 아, 정우한테 귀띔해 줄까? 아닌가, 오지랖인가. 괜히 오해사려나.’
“자, 그럼 갈까?”
“롤러 코스터어!!”
목줄 풀린 다윗이 튀어 나가고, 아랑과 시유가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정우는 평소 걸음대로 움직였고, 나는 맨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롤러코스터 대기소는 벌써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잊을 만하면 위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드디어 우리가 탈 차례. 다윗은 고수처럼 보이는 어떤 아저씨와 맨 앞자리에 앉았고, 그 바로 뒤에 아랑과 시유가 앉았다. 나는 적당히 중간자리를 골랐고, 정우는 내 옆에 앉았다.
출발하기 전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딱딱딱딱딱. 죽음의 등뼈를 타고 올라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서서히 레일이 사라져 갔다. 차근차근 쌓이는 공포감이 극에 달한 순간, 아주 짧은 예고편처럼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웃음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꺄악!”
“아하하하하하!”
이윽고 무자비한 힘이 내 몸을 끌어내렸다. 그렇게 내 정신은 육체와 분리되었다.
영원과 같은 코스가 끝나고, 롤러코스터가 멈춰 섰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발이 땅에 닿고 나서야 비로소 아직 살아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나가는 문을 향해 흐느적흐느적 걷고 있는데, 다윗과 아랑이 소리쳤다.
“끝내준다! 이런 기분 처음이야!”
“정말, 시험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갔어!”
“우리 한 번 더 타자, 응?”
“그럴까? 그러자!”
‘저 미친놈들이..! 이걸 또 타자고?’
바로 또 한 번 타려는 세 사람에게 정우가 말했다.
“미안, 나는 연달아 두 번은 무리일 거 같아.”
“어? 진짜?”
“응. 솔이 너는?”
“실은 나도...”
“그럼 너희 셋이 타고 와. 나랑 솔이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알았어.”
“금방 올게~ 쉬고 있어~”
정우는 꼭 철부지 자식들을 배웅하는 아버지처럼, 신나게 뛰어가는 셋에게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세 명이 대기줄 맨 뒤에 가서 서자, 정우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우린 저기 벤치로 갈까?”
“그래.”
벤치에 앉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놀이기구만 바라보았다. 주변 소음이 말의 빈자리를 채우고, 구멍 뚫린 비닐봉지에 담긴 물처럼 생각이 거기로 빠져나갔다.
“... 누군가에겐 일탈, 우리에겐 헤테로토피아인 이곳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이겠구나.”
정우가 어딘가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매표소 직원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게.”
“보니까 놀이기구 잘 못 타는 거 같은데, 오늘 괜찮겠어?”
“뭐, 죽기야 하겠어?”
“하하, 죽으려고 온 건 아닐 텐데 말이야.”
정말, 맞는 말이다. 오늘은 아닌데.
... 그렇지. 이것도 어쩌면 좋은 연습이 될지도.
“자꾸 타면 익숙해지려나?”
“보통 그렇다고들 하는데, 그것도 개인차가 있지 않을까? 너무 무리하지 마.”
나는 곁눈으로 정우의 옆얼굴을 보았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는 딱히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 너 사실 괜찮지? 혹시 나 때문이야?”
“음~ 흐흠. 많이 안 좋아 보이길래. 더 태웠다간 진짜 큰일 나겠다 싶어서.”
“그럼 나 혼자 빠져도 되는데.”
“나도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냐. 너랑 얘길 좀 하고 싶기도 했고.”
나는 몸을 돌려 제대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도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말이야, 지독한 거짓말쟁이였거든.”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변명이지만, 주말에 자꾸 일이 생기네요.. 아무래도 연재일을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미루는 편이 낫지 싶습니다. 감기 시즌도 다가오고 있고요.. (체력이 저질이라서요)
변경하게 되면 공지 올리겠습니다. (_ 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보내시고, 내일 좋은 하루 되세요.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