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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이스트(Echoist)(2)

by Outis

“정우야, 너 파란색 받았지? 나랑 바꾸자.”


나는 하민이가 내민 분홍색 선물꾸러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필과 지우개, 사탕. 안에 든 물건들은 내 것과 완전히 똑같고 색깔과 무늬만 달랐다.

좋아하지 않는 색깔. 좋아하지 않는 무늬.


“......”


스르륵 눈길을 내려 이번엔 내 손에 든 선물꾸러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내가 좋아하는 비행기와 구름무늬.


‘바꾸기 싫어. 내 게 더 좋아.’


“왜 그래? 싫어?”


하민이가 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숙여 하민이의 눈을 피했다. 손에 힘을 주자 선물꾸러미가 손 안에서 살짝 구겨졌다.


바꾸기 싫은데... 내가 거절하면 하민이는 어떻게 나올까?

속상해할까? 화를 낼까? 계속 바꾸자고 조를까?


그럼 어떡하지?


누구와 얼굴 붉히고 싶지 않다. 다투고 싶지 않다.

미안해하기보다는, 싸우기보다는 그냥 주는 쪽이 낫다.


- 걘 다 해주잖아.


그래서 다른 애들이 날 쉽게 본다 해도 상관없어. 내가 편해서 그렇게 한 거니까.


나는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하민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역시 이게 맞는 거구나.’


하민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나는 못내 아쉬운 눈으로, 하민이가 가져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선물꾸러미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너네 지금 뭐 하니? 정우가 싫어하는 거 안 보여?”


나와 하민이, 하민이 조금 뒤에 있는 재희까지. 우리 세 사람은 갑자기 끼어든 그를 돌아보았다.

정성스레 땋은 가닥과 노란 리본으로 멋을 낸 곱슬머리. 나풀거리는 하얀 레이스 원피스.

아랑이였다.


아랑이는 양손을 허리 위에 올리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하민이의 손을 노려보았다.

하민이는 하민이 나름대로 눈살을 찌푸리며 아랑이를 흘겨보았다. 아랑이는 하민이가 평소에도 가장 싫어하는 애였다. 주로 원피스를 입고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것이나, 지금처럼 자기 일도 아닌데 나서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뭐라는 거야? 정우가 뭘 싫어해?”


“딱 봐도 싫어하는 표정인데 뭐. 너네, 정우가 착하다고 해서 막 너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 아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랑이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랑이가 나를 마주 보며 말했다.


“너도, 싫으면 싫다고 해. 괜히 다 해줄 필요 없어.”


마치 내심 기다리던 허락이 떨어진 것처럼, 앞으로 내민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그걸 본 하민이가 더 약이 올라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뭔데 나서? 진짜 짜증 나게! 야, 박정우! 말해 봐. 싫었어?”


내려가던 손이 멈칫했다. 나는 하민이와 아랑이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얼른 대답하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목이 따끔거리고 입이 바짝 말라왔다. 바꾸기 싫었다고 하면 하민이가, 안 싫었다고 하면 아랑이가 속상해할 거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다.

이제 어떡하지? 이젠 ‘나만 참으면 돼’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불편해. 불편하다고. 이런 거 싫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모른 척 뒤돌아서 도망갈 수만 있다면.


아랑이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솔직히 말해. 겁먹지 말고.”


‘... 내가, 겁먹었다고?’


팽팽히 당겨져 있던 줄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섬뜩한 가위날이 서늘하게 잘라낸 그 속에서 무언가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무조건 ‘괜찮다’ 하는 내 모습과 진상 손님에게 굽신거리는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이상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겁먹은 게 아냐. 겁쟁이라서가 아니야. 겁쟁이라서가 아니라고!’


날뛰는 감정과 비난의 화살이 아랑이를 향했다.


‘다 너 때문이야. 아무 문제도 안 만들고 잘 넘길 수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인 건 다 너 때문이야.’


나는 아랑이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딱 잘라 말했다.


“난 괜찮은데. 자, 하민아 받아.”


내가 내민 선물꾸러미를 받아 들고 하민이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아랑이에게 흔들어 보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재희도 키득거리며 아랑이를 비웃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아랑이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휙 뒤돌아 가버렸다. 승리감에 취한 하민이와 재희가 그 등에다 대고 뭐라고 떠들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주, 아주 짧은 후련함 뒤에는 기나긴 후회가 남았다.





“엄마, 저 오늘 쿠키 하나만 가져가도 돼요?”


“유치원에? 뭐 하려고?”


“줄 사람이 있어서요.”


“그래. 그렇게 해.”


쿠키를 넣으려고 가방을 열자, 어제 바꾼 분홍색 선물꾸러미가 보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물꾸러미를 가방에서 꺼내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유치원에 온 나는 내내 아랑이에게 말을 걸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 오전 야외 놀이 시간이 찾아왔고, 나는 얼른 가방에서 쿠키 봉지를 꺼내어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노란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고 온 아랑이는 평소처럼 친구들과 재잘재잘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아랑이의 등 뒤로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아랑이가 돌아보았다.


활짝 웃고 있던 얼굴이 날 보자마자 차갑게 굳었다.


나한테 화가 나있겠지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 얼굴을 대하니 긴장이 되었다.


“저기...”


“왜?”


“잠깐 따로 나랑 얘기 좀 해도 돼..?”


“... 얘들아, 잠시만.”


아랑이와 나는 한적한 구석에 가 마주 보고 섰다. 아랑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무슨 얘긴데?”


“저... 어젠 미안했다고 하려고.”


“네가 왜 미안해?”


“어?”


“너 안 싫었다며. 그럼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지. 괜히 끼어들었으니까.”


“......”


“미안했어.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아는 척하지 말아 줘.”


“?! 왜..?”


“자기 생각도 제대로 말 못 하는 건 바보라고 우리 아빠가 그랬거든. 그리고 난 너 같은 거짓말쟁이는 딱 질색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아랑이는 휙 가버렸다.

저렇게 매서운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막 내뱉다니. 처음 보는 아랑이의 모습에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놀이 시간 내내 나는 혼자 서서, 주머니에 든 쿠키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점심시간. 금요일이 아니어서 오늘도 우유는 흰 우유였다.


선생님이 잠시 한눈을 파시는 동안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흰 우유를 싫어해서 어제도 남겼다가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은 도윤이었다. 그는 대뜸 자기 우유를 내밀더니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더러 자기 우유도 마셔달라는 거였다.

내가 고개를 저은 걸 못 본 건지 도윤이는 내 탁자에 우유를 올려놓고 가버렸다.


나는 탁자에 놓인 도윤이의 우유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이미 점심을 다 먹고 우유까지 다 마신 내 배가 얼마나 불러 있는지, 오늘 이상하게 속이 쓰린 것도 상관하지 않고 꿀꺽꿀꺽 우유를 마셨다. 중간에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집스럽게 계속 마셨다.


그러다 그만 토기가 올라왔다. 나는 입 안에 가득 든 우유를 울컥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웩, 우웩!”


입에서도 코에서도 우유가 질질 흘러나왔다.

배가 아팠다. 코가 찡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참에 나는 그냥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아아아아!”


이렇게 울어본 게 얼마만이더라. 다시 아기가 된 거 같아서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나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답답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거 같아서였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선생님이 달려오셨다.


“어머, 정우야! 괜찮니? 어떡해.”


선생님은 티슈로 내 얼굴을 닦아 주셨다. 마침 복도를 지나시던 원장 선생님도 오셔서 선생님을 도우셨다.

어질러진 탁자와 바닥을 정리하시던 선생님이 우유가 두 개 있는 걸 보시고 의아해하시며 물으셨다.


“왜 우유가 두 개지?”


주변에서 애들이 술렁였다. 슬쩍 돌아보니 도윤이는 애써 모른 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 가운데, 웬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이가 정우한테 자기 것도 마시라고 억지로 줬어요.”


아랑이였다. 나는 그새 제법 부어버린 눈으로 아랑이를 바라보았다.

원장 선생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도윤이에게 물으셨다.


“정말이야, 도윤아?”


“아,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마. 내가 다 봤거든?”


“내가 언제! 너야 말로 거짓말 하지 마!”


“그럼 네 우유는 어디 있는데?”


“버, 버렸어. 다 먹고 버렸어!”


“아~ 그래? 그럼 저건 누구 건데?”


“내가 어떻게 알아! 정우한테 물어봐. 정우야, 나 아니지? 그렇지?”


모두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 얼굴들을 쭉 훑어보다가 아랑이의 얼굴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아까 분명 아는 척하지 말자 내놓고.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내가 싫다고 해놓고.

나는 일자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 맞아요.”


도윤이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도윤이가 자기 우유도 마시라면서, 싫다고 했는데도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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