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처음에는 속을 잘 모르겠어서 경계했었는데,
이제야 알 거 같다.
노대수와 트러블이 있던 날, 처음으로 정우와 말을 나눈 그날, 정우가 내게 한 말의 의미를.
- 거기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던데?
정우는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비스듬한 칼날처럼 눈빛을 세우고서, 앞에 가는 정우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든 생각을 재려 했다.
잘 모르겠다.
제대로 봐놓고 왜 마음이 바뀐 걸까.
- 보면 볼수록 넌 좋은 녀석이구나 싶어.
- 나도 너와 더 친해지고 싶단 뜻이야.
대체 나의 뭘 보고.
- 걘 이미 널 자기 영역에 넣은 거 같던데? 다윗이도 널 특별히 생각하고 있고.
대체 뭘 보인 거냐, 나는.
난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특별히 여겨질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 쟤들 눈에 비친 나는...
- 가능한 걔한테 진솔한 모습을 보여줘.
평생 연기를 해왔다. 상대에 맞추어 적절한 가면을 골랐다.
부모님 앞에선 손 안 가는 아들, 선생님들한테는 말 잘 듣는 모범생, 동급생들 사이에선 투명인간...
분명, 존재감 없는 투명인간이었을 텐데.
자꾸만 귀찮게 찾아오는 작은 발자국 소리. 장조림 핑계를 대며 말을 걸던 목소리. 슬그머니 자연스럽게 끼어들던 점잖은 미소.
‘... 언제부터였지?’
앞서 가는 네 사람과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걸음걸이, 그리고 배경처럼 그들을 둘러싼 놀이공원의 풍경이 마치 텔레비전 화면처럼 느껴진다. 익숙함과 낯섦이 적절히 섞여 미시감(익숙한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현상) 속으로 녹아든다.
그게 안 그래도 복잡한 생각을 더 어지럽히기에,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낮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혼자 웃기 시작한 것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아직 살아 있음을 탄식하는 게 아니게 된 것은.
하루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된 것은.
언제부터 이렇게 안 어울리는 짓을 하게 된 걸까.
[너랑 어울리는 건 고통과 후회, 죄악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인데 말이야.]
언제부터 거기서 벗어난 걸까...
위이잉. 우우웅.
날이 없는 거대한 낫으로 끈덕진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바이킹 배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높아져 갔다.
[무딘 칼날은 고통만 더할 뿐이지.]
우두커니 서서 바이킹을 올려다보는 나를 다윗이 손짓하며 불렀다.
“앙마야, 뭐 해? 빨리 와!”
“... 가.”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험을 축적하여 원리를 도출하는 귀납법. 다른 하나는 이미 구축된 원리를 토대로 구체적인 사실을 추론해 내는 연역법.
근대 과학에서는 주로 귀납법으로 가설을 세워 연역법으로 검증하는 방법을 썼다 한다. 나무에 달린 사과가 반드시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사과를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고 추론, 중력을 발견했다던가 하는 게 그 좋은 예시다. 즉, 경험에 논리적 사고를 보태어 새로운 지식을 쌓은 것이다.
반대로,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지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체험만큼 좋은 게 없다.
위이잉!
나는 지금, 무자비한 진자운동을 반복하는 물체에 달라붙어 중력을 체험하는 중이다.
시각 정보를 차단해도 몸은 다 느끼고 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알고 있다. 찌릿하고 통하는 전기신호에 움찔거리며, 탁 풀어진 느낌에 벌렁거리며, 어째서 우릴 이런 사지에 몰아넣었느냐고 원망하고 있다.
유구무언. 할 말이 없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떨고 있을 뿐.
잡생각을 없애려면 몸을 움직이라더니. 아까까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생각들이 탈곡기에 털린 왕겨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 하하, 하하하하하...”
너무 무서우면 사람이 실성을 한다. 사람이 실성하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또 하나의 진실을 몸소 검증하였다.
마침내 공중에서의 고문이 끝나고, 나는 지면과 눈물겨운 상봉을 했다. 너무 반가워서 구역질이 날 지경이건만, 다윗이 입을 쭉 내밀며 말했다.
“바이킹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치?”
암, 별로였지. 별로였고 말고. 누구 하나 죽어나가야 만족을 하겠지, 너는?
맘 같아서는 한 소리 해주고 싶은데, 까딱 잘못 입을 벌렸다가는 바로 속을 게워낼 거 같다. 왜 이렇게 비위가 약할까 하고 속상해하는 것조차 지금은 사치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내가 걷는지, 아니면 바닥이 움직이는지, 헷갈린다.
“어? 야, 너 괜찮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
“왜 그래? 토할 거 같아? 화장실 갈까?”
나는 힘겹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안 되겠다. 우리 잠깐 앉아서 쉬자.”
한사코 마다하는 나를 정우가 벤치로 끌고 가 앉혔다. 아랑과 다윗은 음료수를 사러 갔고, 시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시유뿐만이 아니겠지. 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러나, 이럴 거면 쟨 뭐 하러 따라왔나 하고 다들 생각하지 않을까.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뭣보다 속상하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닌데...’
내가 한숨을 쉬며 엄지두덩으로 이마를 짚는 걸 보고 정우가 날 위로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체질 상 안 맞는 사람이 있어. 게다가 누구보다 힘든 건 너잖아.”
“... 미안.”
“아니야. 너무 과격한 기구만 고른 우리 탓이 커.”
조금 뒤 다윗과 아랑이 양손에 음료수를 들고 왔다. 다윗은 물어보지도 않고 잘그락 얼음 소리가 나는 음료수 컵을 내 볼에 갖다 대었다.
“앗, 차가!”
“가만히 있어봐. 이럼 좀 속이 가라앉을지도 몰라.”
“확실해? 무슨 근거로?”
“딸꾹질 날 때 놀래키는 것처럼, 뭐 그런 거?”
“... 가라앉는 건 잘 모르겠고, 점점 얼굴에 감각이 없어지고 있는데.”
“주절주절 떠드는 거 보니 괜찮은 거 같구만.”
“이 자식이.”
“이거 봐, 이제 괜찮네. 혈색도 돌고.”
다윗이 컵을 치우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마셔보란 말 한마디 없이 빨대를 쪽쪽 빨면서 혼자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혈색이 도는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로 혈관이...”
“아, 시끄러. 마셔.”
“읍, 펩! 퉤! 야! 마시던 걸 주면 어떡해?”
“그럼 네 개 밖에 안 사온 걸 어떡해? 손이 네 개뿐인 걸.”
“그게 내 탓이야?!”
다윗과 옥신각신하다 보니 어느 순간 속이 멀쩡해졌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음료수를 다 마실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빈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다윗이 물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
“다들 음료수 마셔서 배부르지 않아? 타는 놀이기구 말고 다른 거 어때?”
“다른 거? 뭐?”
모두의 눈이 정우에게로 쏠렸다. 정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령의 집.”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둡고 음침하고 울퉁불퉁한 길. 사방에서 들려오는 귀신의 곡소리와 혼을 채갈 것만 같은 웃음소리.
내 앞에서 걷는 형의 손을 꼭 잡고, 나는 형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손에 땀이 흥건히 맺혔다. 미끄러워져서 자칫 놓칠세라, 나는 얼른 다른 손으로 형의 손을 잡고 바지에 땀을 닦았다. 땀은 바꿔 잡은 손에서도 났고, 다시 아까 그 손으로 형을 잡았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느새 형도 나와 똑같이 하고 있는 걸.
고작 네 살 위. 형도 아직 어린애였는데.
어쩌다가 어린 두 소년은 보호해 주는 어른 하나 없이, 서로만을 의지하며 걷고 있었던 걸까.
그토록 무서운...
“어서 오세요, 유령의 집에~”
“......”
무, 서운..?
“끼히히히히히~”
무섭기는. 지금 보니 어설프기 짝이 없다.
아무리 어렸다지만, 형도 나도 고작 이런 거에 벌벌 떨었단 말인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지옥행 엘리베이터를 타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 엘리베이터는 지하 수백 킬로미터를 단숨에 내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저승사자가 엘리베이터에 탄 손님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대륙 지각 두께가 평균 35km 정도 되니까, 그럼 지옥은 지구의 맨틀에 위치하고 있나 보다. 이런 잡생각이나 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데, 난데없이 저승사자가 소리쳤다.
“여러분! 당장 벽에서 떨어지세요! 식인벌레들이 잡으러 옵니다!”
우당탕탕.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벽에서 떨어지려고 아우성을 쳤다. 거짓말일 게 뻔한데도 분위기란 건 무시 못하는가 보다.
그나저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렇게 움직여도 되나. 한껏 동요한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있자니, 문득 이 엘리베이터의 안전성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그 난리통에 휩쓸려 정우와 나머지 애들이 먼저 나가는 게 보였다.
어차피 출구는 하나. 여기서 헤어져도 밖에서 만나면 된다. 뒤편에 서있던 나는 느긋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발목을 잡았다. 한껏 여유 부리다가 예상치 못한 급습을 당한 바람에 머리가 쭈뼛 섰다.
‘오! 그래도 제법 무서운 것도 있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 여자가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 너 뭐 하냐?”
아랑이었다.